이휘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33
한자 李徽逸
영어공식명칭 Lee Hwiil
이칭/별칭 익문(翼文),존재(存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19년연표보기 - 이휘일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72년연표보기 - 이휘일 사망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지도보기
외가|처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묘소|단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사당|배향지 인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재령
대표 관직|경력 경기전참봉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이휘일(李徽逸)[1619~1672]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으로 동생 이현일(李玄逸)과 함께 퇴계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문집으로 『존재집(存齋集)』이 전한다.

[가계]

이휘일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은보(李殷輔)이며, 할아버지는 현감 이함(李涵),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시명(李時明)이다. 어머니는 안동장씨 장흥효(張興孝)의 딸 장계향(張桂香)이다. 숙부인 이시성(李時成)의 양자가 되었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박륵(朴玏)의 딸과 풍산김씨(豐山金氏) 김시종(金時宗)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휘일(李徽逸)은 1619년에 외가인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나 외할아버지 장흥효에게 수학하였다. 5세 때 오경(五經)의 주요 글귀를 외웠고, 9세 때에 고양이와 호랑이의 차이를 품은 뜻의 크기로 분별한다는 내용의 「묘호설(猫虎說)」을 지었다. 19세 때는 아버지 이시명에게 가학을 전수받았다. 이 무렵에 이시성의 양자가 되었고, 박륵의 딸 무안박씨와 혼인하였다.

장흥효와 이시성에게 가학을 전수받은 이휘일은 20세 이후 권익창(權益昌)·김광계(金光繼)·김응조(金應祖)에게 학문을 배웠다. 생부인 이시명이 영양 석보로 이주하였으나, 양부를 모시기 위해 영해 인량리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형제들과 자주 모여 강론하였다. 특히 동생인 이현일과는 평생을 함께 수학하였다. 이 외에도 김학배(金學培)·홍여하(洪汝河) 등과 교유하였다. 35세 때에는 영해부사 최혜길(崔惠吉)이 행의(行義)로 천거하여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43세 때에는 영해의 저곡(楮谷)으로 거처를 옮기고 ‘명서(冥棲)’라고 당호를 짓고 은거하였다. 주변의 시내를 ‘옥천(玉川)’이라고 이름짓고 못을 ‘뇌택(雷澤)’이라 이름하여 소요할 공간으로 삼았다. 현재의 존재종택도 저곡에 자리하고 있다.

[학문과 저술]

이휘일은 경당 장흥효를 통해 퇴계학맥을 이어받았으며, 동생인 이현일에게 가학을 전수하였다. 이 학맥은 이현일 이후 ‘이재-이상정-류치명’에게 이어지면서 영남학파의 중심을 이루었다. 문집인 『존재집(存齋集)』은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이현일이 2책으로 유문을 정리하였고, 1687년에 영해부사 임원구(任元耈)의 서문을 받아 놓았다. 그런데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이현일이 문집 간행을 진행하기 어려워졌다. 1696년 이후에야 습유(拾遺)를 붙이고 행장·묘지명·제문·만사 등을 부록(附錄)으로 추가하여 3책으로 간행하였다.

동생인 이현일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하려고 논의하여 편목과 체제를 잡고 연구하였으나 생전에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이 책은 이현일이휘일 사후 계속 저술을 진행하여 1686년에야 완성하였고, 이후 이현일의 후손인 이재(李栽), 이휘일의 후손인 이유원(李猷遠)·이주원(李周遠) 등이 교감한 뒤에야 간행되었다.

[묘소]

처음에 영해의 인량리에 장사지냈으나, 이후 영양의 석보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696년에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인산서원은 동생인 이현일도 함께 제향되어 있었으나, 1741년에 훼철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