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30
한자 金鶴伊
영어공식명칭 Kim Haki
이칭/별칭 김학이(金學伊)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연표보기 - 김학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학이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김학이 병곡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3년연표보기 - 김학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학이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학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학이는 1888년(고종 25)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묘곡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학이(金學伊)이다.

[활동 사항]

김학이는 1919년 3월 18일 영해면·병곡면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영해면·병곡면 만세운동은 기독교 측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 등과 지역 유지들의 주도 아래 전개되었다. 특히 권태원이 3월 15일 병곡면 송천리의 정규하를 만나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정규하는 "3월 18일 영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정규하의 제안에 권태원이 동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후 권태원정규하영해면 3.1독립운동을 위해 동지규합 및 태극기 제작에 나섰는데, 김학이정규하의 권유로 참가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김학이는 정규하·남계병(南啓炳)·남효직(南孝直) 등 2천명의 군중들과 함께 영해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학이와 군중들은 영해면에 있는 일제 침략기관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뿐만 아니라, 공립보통학교와 공립소학교 등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경찰은 해산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군중들은 격렬하게 대항하였다. 당시 김학이는 주재소와 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정규하와 함께 오후 2시경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인접한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일제 주재소·면사무소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후 군중들은 오후 6시경 해산하였으며, 3월 19일 영해면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학이는 영해면·병곡면 만세운동이 끝난 3월 19일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붙잡혔다. 당시 영해에서 250명, 병곡에서 40명이 붙잡혀 총 290명이 구금되었다. 김학이는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경주지청을 거쳐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량이 징역 1년 6월형으로 변경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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