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서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032
한자 九峯書院
영어공식명칭 Gubong Seowon
이칭/별칭 구봉정사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창수영해로 269[원구리 576-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66년연표보기 - 구봉정사 건립
건립 시기/일시 1785년연표보기 - 구봉정사에서 구봉서원으로 승격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 - 구봉서원 강당건물만 남기고 모두 훼철
개축|증축 시기/일시 1808년 - 구봉서원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4년 - 구봉서원 묘우 중수
현 소재지 구봉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창수영해로 269[원구리 576-1]지도보기
성격 서원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5칸
소유자 무안박씨 무의공파종회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구봉서원(九峯書院)은 박의장(朴毅長)[1555~1615]·박홍장(朴弘長)[1558~1958] 형제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665년(현종 6) 구봉정사(九峯精舍)로 처음 설립하였고, 1785년(정조 9)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제향자 박의장의 본관은 무안(務安), 호는 청신재(淸愼齋),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무관으로서 관직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박홍장의 호는 농아당(聾啞堂)으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1596년(선조 29)에는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왔다.

[위치]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원구마을 서편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1.2㎞ 떨어진 지점에 인량리 전통마을이 있으며, 그 사이로 넓은 들판과 송천이 가로지른다. 서쪽에는 중구봉(重九峯)이 있는데, ‘구봉’이란 서원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변천]

1665년(현종 6) 영해(寧海) 유림 백동현(白東賢)이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에게 구봉정사 건립을 청원하였으며, 유림과 관부의 지원을 받아 1666년 완공하였다. 1784년 박의장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을 계기로 서원 승격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1785년 영해도호부사 홍언철(洪彦喆)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서원으로 개제(改題)하였다. 1808년(순조 8) 대대적인 건물 중수가 이루어져, 1824년에는 묘우를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형태]

초창기 구봉서원의 사당은 3칸 규모의 정충사(精忠祠), 강당은 8칸 규모의 돈전당(敦典堂)이었다. 이후 중건을 통해 10칸의 강당, 3칸의 동재·서재, 누각인 망일루(亡日樓), 주사(廚舍) 16칸, 전사청(典祀廳) 2칸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서원훼철령 이후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몇 차례 개조가 되었는데,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전면에는 4분합들문을 달아 놓았으며, 난간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정면에 대청, 좌우에 각각 2칸과 1칸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다.

[현황]

서원 재건을 위해 후손들이 서원복설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구봉서원의 존재 양상을 통해 조선 후기 영해 유림과 무안박씨 가문의 향촌 사회활동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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