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31
한자 三國 時代
영어공식명칭 Three Kingdoms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방기철

[정의]

강원도 영월군 지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던 시기의 역사.

[개설]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되기 전까지인 42~562년까지는 고구려·백제·신라뿐 아니라 가야도 존재하였던 만큼 사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로 성장하였지만, 가야는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멸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국 시대보다는 삼국 시대가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삼국 시대는 고구려가 초기 고대 국가로 성립하는 1세기경, 또는 백제가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를 형성하는 4세기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7세기 중반까지를 가리킨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 268-7번지 일원에 있는 팔괴리 유적의 주거지는 평면이 육각형인데, 이는 한성백제 시기에 유행한 것이다. 팔괴리 유적은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 시기 강원도 영월군은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영월군을 백월(百越)이라고 하였는데, 가구 수가 100호가 넘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백제는 남한강 상류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렇다면 3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영월 지역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5세기 이후 영월 지역은 고구려 영역에 편제되었고, 장수왕(長壽王)대에는 내생군(奈生郡)으로 불렸다. 551년에는 신라가 내생군을 차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6세기 이후 영월 지역에는 중부 지역과 강원도 동해안에서 유행하였던 중도 유형 문화(中島類型文化)가 해체되고, 신라 문화가 유입되었다.

[삼국 간 전쟁과 영월]

삼국 시대에 강원도 영월군 지역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하게 전투를 펼친 전략적 요충지였고, 이런 이유로 순차적으로 백제·고구려·신라의 영역에 속했다. 남한강 상류에 있는 강원도 영월군은 강원도와 충청도로 이어진다. 강원도 영월군을 확보하면 남쪽으로 경상북도, 북쪽으로 황해도로 진출할 수 있다.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신라가 북상하면서 전투를 펼친 곳이 영월 지역이라는 사실은 삼국이 모두 영월 지역에 주목하였음을 보여 준다.

삼국 중 처음 영월 지역을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5세기 이후 고구려가 죽령(竹嶺) 이북까지 진출하였을 때 영월 지역은 고구려의 판도 아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에 있는 왕검성(王儉城)을 남진 정책의 기지로 삼았는데, 충청북도 단양군에 있는 온달산성(溫達山城)을 전진 기지로 삼으면서, 왕검성은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 신라가 남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강원도 영월군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는 강원도 영월군을 통하여 북상하면서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왕검성을 개축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양산성(正陽山城)을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통일 전쟁을 수행할 때 역시 정양산성은 군사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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