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56
한자 日帝 强占期
이칭/별칭 식민지 시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엄찬호

[정의]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광복에 이르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개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한 1910년 8월 29일부터 광복을 한 1945년 8월 15일까지 세계 식민지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혹독한 식민지 통치기이다. 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사회·경제적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으로 피폐화시켰고,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일제 강점기 내내 끊임없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연합군에게 패전하자 참전국의 일원인 한국은 8·15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한국은 자주적인 근대화 발전이 저지되었고, 민주주의 정치 경험을 지닐 기회가 박탈된 처지에서 광복 후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였으며, 더구나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로 6·25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것은 실로 일제의 강점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35년간의 식민지 통치는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한일병탄조약으로 국권인 피탈된 1910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의 무단통치기이고, 제2기는 1919년 이후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는 시기 이전까지의 문화 통치기, 제3기는 1931년 만주 침략으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민족문화 말살기로 구분한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과 인구]

일제 강점기 영월군의 행정구역은 크게 변동 없이 영월면을 비롯하여 하동면, 상동면, 북면, 서면, 남면, 양변면, 수주면 등으로 8개 면에 57개 정리(町里)가 있었다. 영월군의 인구는 1927년에 한국인 1만 1453호에 5만 9994명, 일본인 71호에 188명, 중국인 7호에 14명으로 총 1만 1532호에 6만 196명이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인 1939년에는 한국인 1만 4724호에 7만 2603명, 일본인 254호에 676명, 외국인 169호에 174명으로 총 1만 2887호에 7만 3452명이었다.

[일제 강점기 교육시설]

일제 강점기의 교육시설로는 보통학교를 비롯하여 소학교와 간이학교, 서당, 유치원 등이 있었다. 영월군에서 근대교육 시초가 된 영월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은 1912년 7월 2일이었고, 주천공립보통학교는 1919년 11월 1일 개교하였다. 1943년에는 영월에 공립국민학교가 19개교에 4,457명의 학생이 있었고, 부설간이학교는 11개교에 553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처럼 영월에 부설간이학교가 많았던 것은 산간지역에서 정상적인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한창 광산 개발로 근로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1922년에는 수업연한 1년의 영월농민학교가 별도로 설립되었고, 일제가 한국인을 동화시키기 위하여 일본 헌병을 동원하여 설치하고서 일본어 교육을 강요한 강습소가 1913년 당시 4곳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산업시설]

일제 강점기 영월의 산업시설로는 영월화력발전소가 1935년에 착공되어 1941년 준공되었다. 1943년부터 본격적인 전력 생산을 시작해 현재까지 가동되며 현재는 복합화력발전소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영월에는 시금광, 철광, 금은아연광 등의 광업이 성행하여 크고 작은 광업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어 있었다. 1924년 1월 18일에는 영월군 서면 소재 사금광 21만 9730평[0.726㎢]의 광업권을 김두성이 설정하였고, 1930년 5월 20일에는 영월군 상동면과 삼척군 하장면에 걸쳐 있는 78만 9500평[2.610㎢]의 금광에 대하여 정선군 동면의 최응렬이 광업권을 설정하였다.

영월군 북면과 평창군 미탄면에 걸쳐 있는 철광 937,000평[3.098㎢]에 대하여 1944년 4월 10일 경성의 서산광업주식회사(西山鑛業株式會社)가 광업권을 설정하였고, 영월군 영월면북면에 걸쳐 있는 철광 935,000평[3.074㎢]에 대하여서는 1944년 4월 12일 경성의 니시야마 기지베이[西山吉兵衛]가 광업권을 설정하였다. 또 1944년 8월 26일에는 영월군 수주면과 원주군 신림면에 걸쳐 있는 금은연아연광(金銀鉛亞鉛鑛)에 대하여 경성의 마쓰조에[松添益一]가 광업권을 설정하였다.

[일제 강점기 설치 기관]

이 외에 일제 강점기 영월군에 설치된 기관으로는 1911년 6월 16일 영월우편소가 설치되었고, 1912년 5월 26일 영월지방금융조합이 설치되었다. 1925년 4월 12일에는 영월불교소년회가 설립되었고, 1926년에는 영월 유지(有志) 40여 명이 영월수재구제회(寧越水災救濟會)를 조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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