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74
한자 寧越 正宗大王 胎室 - 胎室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01년연표보기 - 영월 정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영월 정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 이건
문화재 지정 일시 1995년 9월 18일연표보기 - 영월 정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
현 소재지 영월 정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 지도보기
성격 태실|비석
관련 인물 정조
크기(높이, 너비, 두께) 232㎝[비석 총 높이]|109㎝[비신 높이]|52㎝[비신 너비]|30㎝[비신 두께]|66㎝[석함 높이]|82㎝[석함 지름]
소유자 영월군
관리자 영월군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태실과 태실비.

[개설]

영월 정종대왕 태실(正宗大王 胎室) 및 태실비(胎室碑)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자락 태봉에 조성되었으나 영흥리로 이전 복원되었다.

[건립 경위]

정조가 출생한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자락 태봉에 태를 묻었다. 정조가 사망한 1800년 순조의 어명으로 가봉(加封)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태실 유지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태실에서 석함을 훼손하고 태항아리만 꺼내 서울로 옮겼다가 다시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0년대 석회광산 개발로 대형 송전탑이 들어서며 태실과 태실비가 훼손되었다. 1967년 영월군종합개발위원회에서 현지 흩어진 유물을 수습하여 KBS 영월방송국 옆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997년 왕검성 입구 현 위치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위치]

영월 정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번지에 있다.

[형태]

정종대왕 태실은 팔각원당형부도 모양의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 난간을 돌렸다. 태항아리를 넣었던 석함은 높이 66㎝, 지름 82㎝ 크기의 석함은 일부 훼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태실비는 비신에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신와 이수는 같은 석재로 만들었으며 연결되어 있다. 귀부는 귀갑문(龜甲紋)과 하엽문(荷葉紋)으로 장식되었다. 이수는 쌍룡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사이에 운문을 채웠다. 비는 기단부 포함하여 총 높이 232㎝이다. 비신은 높이 109㎝, 너비 52㎝, 두께 30㎝이다.

[금석문]

비 앞뒤로 명문이 있다. 앞면에는 ‘정종대왕 태실(正宗大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753년 10월 27일 건립되었다는 내용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정조 태실 관련 문헌 사료로 『조선왕조실록』, 『정종대왕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 영월부 관찬 사료 등이 남아 있다. 문헌 사료 외에 현존 태실 중 드물게 석물을 포함한 봉안 유물이 거의 전체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대표적인 태실로 꼽힌다. 1995년 9월 18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으나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장태문화(藏胎文化)는 신라 때 시작돼 고려와 조선 왕실까지 오랜 기간 행하여진 고유의 왕실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역대 왕 태실은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일부만 복원되어 관리 중이다. 영월 정종대왕 태실 및 태실비태봉의 풍수지리적 위치와 현황, 태실 석물 각 부재에 대한 세부 양식 검토, 봉안 유물 특징 규명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최근 태실 유적은 문헌사, 고고학, 미술사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