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768
한자 金尙台
영어공식명칭 Kim Sangtae
이칭/별칭 김경육(金景六),김상태(金相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엄찬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연표보기 - 김상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김상태 이강년 의진 중군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김상태 제천에서 의병 부대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월 21일 - 김상태 청하헌병분견소 습격
활동 시기/일시 1909년 2월 28일 - 김상태 풍기수비대와 격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3월 1일 - 김상태 재산수비대와 격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3월 6일 - 김상태 순흥수비대와 격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6월 26일 - 김상태 예천헌병분견소 습격
몰년 시기/일시 1912년 9월 21일연표보기 - 김상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김상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남천리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거주|이주지 옥동리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지도보기
활동지 강원도 - 강원도
활동지 경상북도 - 경상북도
활동지 충청북도 - 충청북도
사당|배향지 충절사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장터뒷길 20-14[옥동리 산43]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순국 김상태의병장 충절비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금강공원지도보기
묘소 순국선열묘역 - 충청북도 제천시 탑안로26길 53[고암동 58-6]
성격 의병
성별 남성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김상태(金尙台)[1864~1912]는 1864년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강원도 영월군에 거주하다가 일제 침략에 맞서 항일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김경육(金景六)·김상태(金相泰)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상태는 1896년 1월 11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일어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여 중군장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이강년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분개하여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 부대를 결성하였는데, 김상태는 이강년과 의형제를 맺고 의병진에 동참하였다. 이후 이강년이 영월에서 호좌창의진을 결성한 유인석(柳麟錫) 의진으로 들어가자 함께 가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유인석이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국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할 때에도 동행하였다가 3년 후에 귀국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김상태는 정운경(鄭雲慶)과 함께 충청북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1907년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의 내정에 대한 권한과 군사권이 박탈당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였다. 이강년은 1907년 7월 40여 곳의 의병 부대를 소집하여 영월군 주천면에서 연합 의병 부대를 결성하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강년 의진에서 중군장을 맡은 김상태는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 등과 함께 의병들을 이끌고 봉화군 서벽리에서 일본군 부대와 격전을 치르는 등 순흥[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봉화·풍기·영춘[현 충청북도 단양군]·영월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강년이 체포된 뒤 김상태는 정경태(鄭敬泰) 등과 함께 의병 부대를 이끌고 3년간에 걸쳐 경상북도와 충청남도의 접경 지역인 일월산과 소백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김상태 의진은 풍기·순흥·영천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산을 넘어 영월·제천에 이르는 지역과 동으로는 봉화, 남으로는 예천과 안동에 이르기까지 소규모의 부대로 유격 전술을 펼치며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09년 1월 21일에는 의병 12명을 이끌고 청하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2월 28일에는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풍기수비대를 만나 교전을 치렀다. 3월 1일에는 일본군 재산수비대와 일원산 남쪽 기슭에서 접전을 벌였고, 3월 6일에는 순흥수비대를 공격하였다. 6월 26일에는 예천 부근에서 의병 12명을 이끌고 예천헌병분경소의 일제 헌병들과 접전을 벌이는 등 10명에서 20명 안팎의 소규모 부대로 일본군 수비대나 헌병대와 전투를 치렀고, 각 지역에 통문을 보내 의병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고 군수물자와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김상태는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배신한 부하로 인하여 순흥군 남목리에서 체포되었다. 대구경찰서로 이송된 김상태는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적의 손에 욕보이느니 차라리 자진하겠다.”라며 단식 끝에 1912년 9월 21일 사망하였다.

[묘소]

김상태는 사망하기 전 아들에게 “이강년의 묘 곁에 장례해 달라, 황천에 가서도 서로 의지하겠다.”라고 유언을 남겨 이강년의 묘소 옆에 묻혔으나, 1984년 제천시의 ‘의병 묘역 성역화 계획’에 따라 제천시 탑안로26길 53[고암동 58-6] 순국선열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상태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김상태 의병장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되살리고, 항일 의병 항쟁에 대한 역사의식 제고를 위하여 김상태의병장 추모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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