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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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柄極 |
영어음역 | An Byeonggeuk |
이칭/별칭 | 성노(聖老)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한준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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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
성별 | 남 |
생년 | 1893년 |
몰년 | 1965년 |
본관 | 순흥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성노(聖老)이다. 1893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에서 태어났다. 한문을 수학하며 쓰러져 가는 나라를 항상 걱정하며 청년 시절을 보내던 안병극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고,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통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찾으려고 하였다. 안동 지역의 3·1만세시위는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안병극은 1919년 3월 17일 일어난 예안면 1차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안면 1차 만세시위는 이광호(李洸鎬)·이동봉(李東鳳) 등이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記念碑)’를 쓰러뜨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1,5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예안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약 600명은 산을 타고 안동시내로 들어가 3월 18일 안동면 2차 시위에 합세하였다.
안병극은 당시 이병린(李炳麟)을 비롯한 시위 군중과 함께 예안면 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주재소로 들어가 돌과 기와를 던져 유리창을 깨고 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여, 6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