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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615
한자 柳碩
영어음역 Ryu Seok
이칭/별칭 류석,덕보(德甫),개산(皆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95년연표보기
몰년 1655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대표관직 강원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 아버지는 사옹원정 유시회(柳時會),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상주판관(尙州判官) 권길(權吉)의 딸, 처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이정혐(李廷馦)의 딸이다.

[활동사항]

유석은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 6등으로 급제하였다. 1625년 홍문관정자로 있을 때 선조의 제7자이자 인조의 삼촌인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화를 당하자 한문제(漢文帝)의 포속지요(布粟之謠)[한문제가 무고에 의하여 이복동생인 유남(劉南)을 처형한 뒤 백성들 간에 널리 퍼진 그 일을 비판하는 노래]를 비유한 과격한 소(疏)를 올려 인성군을 구하고자 했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를 지냈다.

유석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사헌부장령 재직시 척화론(斥和論)의 대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을 “대명의리(對明義理)와 대청주전론(對淸主戰論)을 제일 열렬히 주장했으면서도 책임질 줄 모르고 군왕을 배반했으니 마땅히 문책해야 한다.”라고 탄핵했기도 했다. 또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변려체(騈儷體)[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로 이루어져 수사적으로 미감을 주는 문체]는 당시 사대부들이 가히 소동파(蘇東坡)의 경지에 들어갈 만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다. 1690년(숙종 16) 세워진 신도비와 함께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신도비문을 찬하고, 글씨는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썼으며 아울러 전자(篆字)했다.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등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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