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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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尙信 |
영어음역 | Yi Sangsin |
이칭/별칭 | 이립(而立),청은(淸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이립(而立), 호는 청은(淸隱). 증조부는 이공려(李公礪), 할아버지는 집의 이사필(李士弼),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이우인(李友仁),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허경(許坰)의 딸이다. 형이 응교 이상홍(李尙弘)과 이상의(李尙毅)이다.
이상신은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봉교를 거쳐 1592년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듬해 정언으로 재임할 때 공도(公道)를 넓혀서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할 것, 간쟁을 받아들여 언로를 넓힐 것, 인심을 수습하여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 기강을 세워 체통을 높일 것, 상벌을 분명히 하여 사기를 고무시킬 것, 검약을 숭상할 것, 수령을 잘 뽑아 백성을 소생시킬 것 등 개선책을 올리자 선조가 가상히 여겨 품계를 올려주었다.
1594년에 함경도순안어사(咸鏡道巡按御史)로 파견된 후 여진족과 민간의 병폐를 상세히 아뢰고 6진 중 한 곳에 유능한 인물을 파견하여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것과 경흥부를 아오지(阿吾地)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1599년 명나라로 보내는 군량미가 수송 중에 부패하여 먹을 수 없다는 불평이 심해지자 수송을 독려해 원성을 진정시켰다.
그 뒤 응교, 승지, 대사성, 대사간, 상호군을 역임하였고, 1605년 동지사겸주청사(冬至使兼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오랫동안 문제가 되었던 화약 수입을 허락받았다. 1607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대마도와의 교역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1608년에는 한성부우윤,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었는데 신도시 건설로 1995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로 이장되었다. 1996년 종중에서 신도비를 세웠다.
이정구(李廷龜)가 신도비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