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004
한자 敎友村
영어공식명칭 Catholic Believer Town
분야 종교/기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한성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개항기 - 교우촌의 형성과 천주교 공소로 계승 발전

[정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도망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충청남도 아산시를 포함하여 일부 지역에 조성한 신앙촌.

[개설]

한국에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신해박해[1791년] 이후이다. 신해박해 당시 참수형을 당한 윤지충(尹持忠)[1759 ~1791]과 권상연(權尙然)[1751~1791]을 보고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 도망하였다. 아산의 교우촌은 아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자들이 피신하여 일군 신앙 공동체 자리로 대부분 여러 고을의 경계에 접한 깊은 산골에 자리한다.

[아산의 교우촌]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천주교 역사는 곧 내포 지역의 천주교 역사이기 때문에, 아산 지역의 교우촌은 내포 지역의 교우촌의 일부로서 형성되어 이어져 왔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내포의 평야 지역에서 인근 산골로 피신하기 시작한 천주교 신자들은 1866년 병인박해 시기에 대규모로 아산의 배방산-태화산-광덕산-봉수산-[예산] 도고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들어가서 남골[현재 아산시 배방읍 세출리], 방아삭골, 부원골[현재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리], 마릿골[현재 배방읍 수철리], 깊은골, 머리서리, 명지개미, 강장, 숫골[현재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감밭[현재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간양골[현재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드르니[현재 예산군 예산읍 수철리] 등의 교우촌을 일구었다.

교우촌들이 이웃한 산골로 계속 이어진 것은 갑자기 관군이 들이닥쳤을 때 다른 교우촌으로 피신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교우촌은 그대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인 공소(公所)가 되어, 조선에 몰래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회 사목(司牧) 활동지가 되었으며,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1886년 이후에는 공식적인 천주교회 공동체로 기능하면서 1890년에 내포 지역에 간양골성당[1896년에 아산 공세리로 이전]과 양촌성당이 설립되는 기반이 되었다.

교우촌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은 비좁은 산골에서 화전(火田)을 일구기는 해도 워낙 농토가 좁은 산골이었으므로 밭농사만 가지고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자들은 18세기 이래 널리 퍼져가던 산업 중에서 교우촌에서 경영하기에 적합한 것을 골라서 직업으로 삼았다. 즉, 옹기(甕器)를 굽거나, 담배나 약초(藥草) 같은 특용작물을 재배하거나, 양잠(養蠶) 또는 양봉(養蜂)을 하거나, 숯을 굽거나, 갓이나 문방구 등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해서 대개 인근 지역의 장날에 나가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천주교 교우촌 가운데는 ‘옹기골’이나 ‘담배골’이 많았다.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의 1903년 연말 보고 서한에는 현재 아산의 공세리, 염치, 인주, 둔포, 선장의 여러 마을들에서 새로 예비자들이 많이 생겼고 그들 중에는 상인, 특히 보부상도 있다는 보고가 나온다. 이런 현상은 박해 시대 교우촌 신자들의 활동이 아산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삽교천, 무한천, 곡교천 유역의 포구 마을들에서 많이 이루어져서 이미 그곳 사람들에게 천주교가 널리 알려졌고, 천주교 신자들이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교우촌에는 극소수 부유한 신자도 있었지만 대다수 신자들은 매우 가난했고 생활이 불안정하였다. 생산 규모 자체가 워낙 영세한데다, 자주 관군이나 외교인[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협박과 착취에 시달렸고, 그나마 큰 박해가 닥치면 잡혀서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모든 생업의 기반을 잃고 타 지역으로 이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교우촌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 나갔다. 이러한 교우촌의 생업 기반, 특히 옹기골은 박해가 끝난 후에도 수십 년간 계속 이어져 오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해체되었고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고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거의 모두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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