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007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김찬영 |
[조선 시대 읍성의 기능]
조선 시대 읍성은 지금의 시청이나 군청처럼 지방 행정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교육·제사 기능까지 갖추었던 성곽을 말한다. 즉 유사시 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지역 주민들이 읍성에 들어가 적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게 여러 방어 시설을 갖추었고, 지방 도시의 대민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읍성은 산성과 달리 유사시에는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사적 요새인 동시에 주민들을 위한 행정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읍성 안팎으로는 주민들이 생활하는 민가와 각종 논과 밭 등의 경작지가 갖추어져 있었다. 인구가 많거나 군사적 요충지가 되는 곳은 오늘날의 시·군청에, 작은 지역은 지금의 읍면사무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청도읍성의 특징]
청도읍성의 가장 큰 특징은 읍성이 자리하고 있는 입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지방의 읍성은 대개 지역의 큰 산인 진산 앞에 위치하는데, 지금의 화양읍 남쪽에 우뚝 솟은 남산이 청도 지역의 진산에 해당된다. 청도읍성은 이 우람한 남산을 배경으로 그 앞쪽인 북쪽에 위치하며, 전방으로는 청도의 큰 젓줄의 하나인 청도천을 바라보며 북향하고 있다. 대개 북쪽의 진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읍성이 자리하는 것과는 반대의 입지 조건이다. 특히 청도읍성의 전방으로는 청도천이 동류하며, 하천변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청도는 신라 시기에는 경주에서 가야 정벌의 통로가 되기도 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개성-충주-청도-동래로 이어진 간선 도로를 통해 대구-팔조령-청도-밀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청도-창령 간, 청도-현풍 간, 청도-경주 간, 청도-대구 간, 청도-경산·자인·영천 간 등의 도로가 발달한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다. 즉 청도읍성은 남쪽의 남산을 배후로 전방의 풍족한 생업 기반을 갖춘 사통팔달의 내륙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청도의 지방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평상시에는 대민 행정 시설로, 위난시에는 군사 시설로 기능하였다.
[청도읍성의 구조와 형태]
청도읍성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자료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옛 문헌 기록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1454], 『경상도 속찬 지리지』[1469],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오산지』[1673], 『오산 군지』, 『여지도서』[1760], 『청도군 읍지』[1832], 『대동지지』[1864], 『청도 군지』[1871], 『청도군 읍지』[1895], 『청도 군지』[1896], 『영남 청도 읍지』[1896], 『청도군 읍지』[1897], 『교남지』[1906], 『조선 환여 승람』[1929], 『청도 문헌고』[1940] 등이 있다. 또한 옛 지도에는 당시 청도에 있었던 읍성과 함께 사찰, 서원, 창고 등의 유적 등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 중 읍성이 잘 그려져 있어 읍성의 형태나 구조, 성 안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여지도서』, 『청도군 읍지』, 『청도 군지』, 『조선 후기 지방 지도』-경상도편(상), 『청도군 읍지』의 「청도군 지도」 등이 있다.
특히 청도읍성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석성])재군동칠리 주회백구십보성내무수, [청덕루]재객사북([邑石城]在郡東七里周回一百九十步城內無水, [淸德樓]在客舍北)’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 이미 석성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자료를 살펴보면, 1589년(선조 22)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리자 부산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대로변에 있는 주군(州郡)의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성이 없는 읍은 신축하라는 왕명에 따라 1590년에 군수 이은휘(李殷輝)가 새로 청도읍성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읍성 내 수많은 건물과 동서 문루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뒤 1669년(현종 9)에 군수 유비(兪秘)가 서문인 무회루을 새로 건립하였고, 1708년(숙종 34) 군수 임정(林淨)이 동문 봉일루를 세웠다. 한편 1870년에 군수 김이교(金履橋)이 남문인 진남루를 건립하여, 읍성은 동·서·북 3성문에서 남문을 더하여 4성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경 일본인이 읍성 내에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동문을 비롯한 성문과 성벽 일부를 헐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양읍 남쪽에 있는 화강지를 축조할 때 못 제방을 쌓으며 읍성의 성벽을 허물고 그 성돌로 축조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도읍성 내 시설로는 먼저 지방 행정 통치와 관련된 관아 시설이 있었는데, 읍성 중앙부에 객사, 그 남쪽으로는 아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주요 행정 기관이 그 남쪽으로 위치하였다. 오서역과 대구로 연결되는 서로(西路)의 서문 근처 일대에 시장이 있었고, 군사 및 군 장교들이 사용하던 군기청, 군기고, 군관청 등의 시설은 주로 북문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문 부근에는 창고인 사창을 비롯해 대동고, 사마소, 고마청이 있었고, 군기고와 창고 사이에 근민당이 있었다. 서역고는 성의 남단에 있었으나 후에 북문 부근의 청심루 주변으로 이건되었다. 읍성 내에 누정도 있었는데, 군기고와 근민당 사이에 청덕루, 북문 서편의 성지 위에 청향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향루는 후에 없어지고 그 자리에 무학당이 들어서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문헌에 따르면 읍성의 규모는 석축(石築)으로 둘레 1,570보(步)[1,403척], 높이 5척 5촌, 여첩이 600첩이라고 전한다. 현재 읍성의 규모는 평면 형태가 동-서간 직선거리 약 930m, 남-북 간 직선거리 약 870m인 장방형에 전체 둘레는 대략 1.8㎞, 면적은 약 20만 1090㎡로 우리나라 읍성 규모로는 중간 규모에 해당된다. 현재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와 서상리 2개 마을에 걸쳐 위치하며, 읍성 안팎으로는 20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동문골, 창마당, 대성골 등의 옛 지명이 전해진다.
청도읍성 중 동쪽 성벽 일부만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현재 동쪽·서쪽·북쪽의 성벽과 북문 및 옹성·치성·적대 등 성벽 주요 시설이 간헐적으로 남아 있다. 아울러 성 안팎으로는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청도 동헌[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03호], 객사 본관이었던 도주관[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지방 교육의 중심인 청도 향교[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근대 쇄국 정치의 표상인 청도 척화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09호] 등 시대의 아픔과 역사를 간직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청도읍성 발굴을 통해 복원하다]
청도읍성은 일제 강점기와 근대를 거치면서 성벽 상당 부분이 허물어지거나 멸실되었다. 특히 읍성이 있는 화양읍은 예전 청도 군청이 있던 중심지로 허물어진 읍성 안팎으로 집들이 들어서고 현대식 건물이 지어지면서 그 흔적마저 찾기 어려워 졌다. 청도군은 현재 전국적으로 읍성이 남아 있는 곳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읍성의 성벽 일부나마 잔존하고, 읍성 안팎으로 석빙고, 향교, 도주관 등 당시 주요는 지방 행정 시설이 남아 있는 청도읍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2003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경상북도 문화재 연구원에 의뢰해 ‘청도읍성 정밀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지표 조사를 바탕으로 같은 해에 ‘청도읍성 보수[복원] 기본 계획’을 수립하여 청도읍성의 중장기적인 보수 정비 사업 및 단계별 사업 추진 방향과 세부 추진 계획 수립을 위한 기본 계획을 제시하여, 추후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보수·정비 의 기본 계획를 수립하고, 문화 관광적 활용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중 1차 추진 사업은 2006년 9월 22일부터 11월 22일까지 동문지 구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고, 2007년 5월 11일부터 9월 3일까지는 북문지 및 옹성, 북쪽 치성, 동문지 곁 적대 구역을 대상으로 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동문지 발굴 조사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를 개설하고,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기존 신작로를 도로로 확장·포장 공사하거나 민가가 들어서면서 성벽이 없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2차 발굴 조사에서는 성벽이 기초 위에 지대석을 놓고 협축법으로 축조한 체성과 함께 방형 평면의 동문 곁 적대[93m×93m], 중층 문루인 북문[정면 3칸, 측면 2칸 문루]과 반원형 편문식 옹성 등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이들 발굴 조사는 관계 전문가의 자문 및 학술회의 등을 거쳐 단계적으로 성벽과 치성을 옛 모습대로 복원 정비하였고, 북문[공북루]도 2층 누문으로 새로이 건립해 당당하였던 옛 성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2009년 8월부터 2010년 8월까지는 성내지[2,815㎡], 북쪽 치성[378㎡], 남문지[227㎡]에 대한 3차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북문 곁 성벽 안쪽으로는 성벽을 제방 삼아 축조한 성내지가 확인되었고, 북쪽 치성 역시 옛 모습대로 그 터가 확인되어 이를 토대로 새로 축조하였다. 한편 남문지는 후대 마을길이 나고, 논이 들어서는 바람에 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 남문의 위치는 3차 발굴 조사한 지점 외에 다른 곳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청도읍성 군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청도군은 단순히 청도읍성의 성벽을 복원·정비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지역민이나 이곳을 찾는 이들이 잠시 쉬며 읍성을 비롯한 주변 여러 문화 유적을 감상할 수 있는 역사 문화 공간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첫 단계 사업으로는 읍성의 성벽을 따라 안팎으로 사유지를 단계적으로 매입하여 민가와 시설물들을 일단 철거하여 성벽이 제 모습을 보이도록 하였다. 아울러 발굴 조사 및 고증 조사를 토대로 성벽을 새로 쌓았다. 이 과정에서 화양읍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와 노력이 수반되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또한 청도읍성 동문 밖에 위치하였던 석빙고 주변 일대를 정비하여 읍성과 연계하여 답사할 수 있는 코스도 정비하였다. 아울러 북쪽 성벽 바깥으로 청도군에서 매입한 지역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고, 주변에 벤치 등을 갖추었다. 연꽃이 한창 필 때면 이곳을 찾는 이들이 한 번씩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옛 청도를 찾던 관리들이 묵어가거나 휴식하던 객사에는 청도를 다스리던 여러 군수의 선정비가 있었다. 이들 선정비를 동문 밖에 마련한 읍성 주차장 곁에 새로 고쳐 세움으로써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선정비가 늘어선 주차장 곁에는 읍성과 어울리는 한옥 카페 ‘꽃자리’와 개인 식물원 ‘꽃구경 가는 길’이 있다. 이곳 역시 청도읍성과 함께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해마다 군민 화합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읍성 밟기’ 행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읍성 밟기 행사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청도읍성을 널리 알리고 조상들의 전통 행사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2013년에는 화양읍 새마을 3단체와 주민들이 준비하였다. 읍성 밟기 행사는 선조들이 남자는 읍성을 지키고 여자들은 성벽을 튼튼하게 다지면서 무기로 사용할 돌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던 유비무환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도 있다. 예부터 읍성을 한 바퀴 밟으면 건강해지고, 두 바퀴 밟으면 오래 살고, 세 바퀴 밟으면 소원성취 한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읍성 밟기 행사는 순국선열을 위한 진혼무 공연, 마상 무예 시범 공연을 시작으로 한복을 차려 입은 여성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화양 농악단의 길놀이로 청도읍성 동문에서 북문까지 복원된 244m 구간에서 한 줄로 읍성 밟기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 행사는 지역민이 직접 참여하는 대표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3년에는 청도읍성의 북쪽 성벽 구간 중 북문에서 서쪽의 성벽 구간을 옛 모습대로 쌓을 예정이다. 읍성 안에 위치하였던 성내지를 옛 모습대로 정비하고, 정자도 지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휴식과 쉼터로 제공하고 있다. 이번 성벽 정비가 끝나면 읍성의 서쪽 성벽 구간도 고증 조사를 거쳐 정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