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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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城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강재현 |
[정의]
고려 시대 이전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던 행정 구역.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대성군 조에 의하면, “대성군은 본래 구도성 경내 솔이산성·가산현·오도산성 등 3성인데 지금은 청도군에 합하였다. 약장현은 원래 악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 경주에 합속되었다. 동기정은 원래 모지정으로 경덕왕이 개칭하였고 지금 경주에 합속되었다.[大城郡 本仇刀城境内率伊山城 茄山縣(一云驚山城) 烏刀山城等三城 今合屬清道郡 約章縣 本 惡支縣 景徳王 改名今合屬 慶州 東畿停 本 毛只停 景徳王 改名今合屬 慶州]”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청도군 조에 의하면, “청도군(혹은 도주)은 고려 초에 신라의 대성군과 오악·형산·소산 3현과 합쳐서 청도군이 되었으며 밀성군의 속읍이 되었다.[淸道郡(一云道州) 高麗初合新羅大城郡烏岳荊山蘇山三縣爲郡 來屬]”라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청도군 조에 의하면, “본래 이서국 땅이다. 신라 때 이서군이 되었다가 후에 대성군으로 고쳤다.[本伊西國地也 新羅時爲伊西郡 後改爲大城郡]”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청도군 건치 연혁 조에 의하면, “본래 이서소국이었는데 신라 유리왕이 이를 정벌하여 취하였고 후에 구도성 경내 솔이산·경산·오도산 등 3성을 합쳐 대성군을 두었다.[本伊西小國 新羅儒理王伐取之 後合仇刀城境內率伊山(伊或作已) 驚山(一作茄山) 烏刀山等三城 置大城郡]”라고 하였다.
[내용]
대성군은 솔이산성, 경산성, 오도산성 등 세 성과 약장현, 동기정을 관할하였던 행정 구역이다. 또한 『삼국사기』 제사 조에 의하면, "대사(大祀)를 지내던 혈례산(穴禮山)과 중사(中祀)를 지내던 토함산(吐含山)·북형산성(北兄山城), 소사(小祀)를 지내던 삼기(三岐)가 모두 대성군 경내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대성군은 청도 지역과 경주 지역에 걸쳐 위치한 상당히 큰 행정 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책 밀성군 조와 비교해 보면 밀성군 내 3현의 초명과 그 위치가 구도성 경내 3성의 이름과 위치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에 모두 똑같이 청도군에 합속되었다는 사실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들 세 지역이 양주 관내의 12개 군 중 밀성군과 대성군에 이중으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서국(伊西國) 조에 의하면 청도군의 전신으로 이서군이 나오지만 대성군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고려사』 지리지 밀성군 조에 의하면 청도군의 전신은 신라의 대성군과 오악, 형산, 소산 등 3현이고, 대성군과 오악 등 3현은 별개의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삼국사기』의 기록과 배치된다.
이처럼 『삼국사기』 지리지의 오류는 이후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후대 지리지에도 영향을 주어 『대동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성군을 청도군의 전신으로 보았다. 김정호는 『대동지지』 청도군 조에서 오악 등 3현의 합속으로 대성군이 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고[三國史地志以烏岳等三縣合爲大城郡者誤], 같은 책 경주 고읍 조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약장현을 포함하는 동남쪽 지역이 대성군이라 생각하였다[大城今本府治所 新羅統合麗濟後置大城郡 領縣一約章及六部東畿停 如今漢城府]. 김정호의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일부 연구자들 역시 대성군은 청도군이 아닌 경주의 동쪽 일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또 일부 연구자들은 경주와 청도에 각각 대성이라는 지명이 혼동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서군이 대성군과 밀성군에 의하여 분할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대성군을 청도군의 전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사료 상의 오류가 확인되고 일부 연구자들이 반론을 펼치고 있어 대성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변천]
신라 유리왕(儒理王)이 이서국을 정벌하여 취한 후 이서군(伊西郡)을 두었다. 후에 구도성(仇刀城) 경내에 있었던 솔이산성(率伊山城)·경산성(驚山城)·오도산성(烏刀山城) 등 3개의 성을 합쳐서 대성군을 두었다. 경덕왕 때 구도를 오악현으로, 경산을 형산현으로, 솔이산을 소산현으로 고쳐 모두 밀성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다시 3개 현을 합쳐서 청도군이 되었고 얼마 후에 밀성군에 내속되었다. 1109년 감무(監務)를 두었고, 1343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감무를 두었다. 1366년 지군사로 승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청도군의 남부 지역을 차지하는 하남면(下南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용산면(龍山面)과 밀양군 상동면(上東面)의 일부를 합쳐 대성면으로 고쳤다. 1919년 대성면을 청도면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읍으로 승격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성군은 청도군의 전신으로 고려 인종 때 편찬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1940년도에 간행된 『교남지』에 이르기까지 『대동지지』를 제외한 모든 지리지와 현행 역사·지리 관련 서적들에 있어서도 모두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호를 비롯한 말송보화(末松保和), 문경현, 김윤우 등 일부 연구자에 따르면 대성군은 청도군이 아닌 경주 동쪽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혼란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오류를 단순히 ‘오류’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떠한 역사적 사정이 개재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와 청도와 경주에 각각 대성이라는 지명이 혼동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대성군의 연혁에 대한 연구가 좀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