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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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有民不忘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동창길 2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건립 시기/일시 | 1779년 - 서유민 불망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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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서유민 불망비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 153 |
성격 | 선정비 |
양식 | 비좌규수(碑座奎首) |
관련 인물 | 서유민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10㎝[높이]|40㎝[너비] |
소유자 | 청도군청 |
관리자 | 청도군청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에 있는 선정비.
[개설]
서유민의 본관은 대구이고, 자는 원경(元畊)이며, 1779년(정조 3)에 태어났다. 1805년(순조 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음직(蔭職)으로 1818년(순조 18) 목릉(穆陵)[선조와 원비(元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그리고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 참봉에 제수되었다. 1826년(순조 26) 8월 삼등 현령[현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청도 군수로 부임하여, 1828년(순조 28)년 3월 가산 군수로 전배(轉拜)되었다. 이후 안주 목사, 안산 군수, 청주 목사, 평양부 서윤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건립 경위]
비석에 제액(題額)과 간지(干支)만 새겨져 있고, 선정 사실을 읊은 찬시(讚詩)가 없어 정확한 건립 경위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화양읍 청도읍성과 매전면 지전리에 있는 서유민의 선정비 찬시 내용이 백성들에 대한 구휼과 청렴결백을 읊은 것으로 미루어 그러한 차원에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비석의 위치가 동창천(東倉川)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창고 또는 치수(治水)와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금천면과 유천·밀양 간 도로 옆 매전면 동산리 동창천변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다. 이동 없이 원래 이 위치에 있는 비석으로 보이며, 하단부 일부는 매몰되어 있다. 우측에 천연 기념물 제295호인 청도 동산리 처진 소나무가 있다. 비각이나 안내판이 없어 구태여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형태]
비석 양식은 농대석(籠臺石) 위에 비신을 세운 비좌규수(碑座奎首) 형태이다. 전면에는 비명(碑銘)을, 후면에는 간지(干支)와 건립 관련자 명단을 각석해 놓았는데 건립 관련자는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다. 재질은 화강암에 높이 110㎝, 너비 40㎝이다.
[금석문]
(전면)
군수 서 후 유민 영세불망비(郡守徐侯有民永世不忘碑)
(후면)
도광 팔년 무자 사월일(道光八年戊子四月日)
[현황]
서유민 선정비는 조선 후기 읍지(邑誌)에도 기록되어 있고, 현재 매전면 이외에도 청도군 내에 금천면 임당리, 화양읍 청도읍성, 매전면 지전리 등에 3기가 더 분포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는 청주 목사로 재직할 때인 1842년(헌종 8)에 건립된 선정비 1기가 청주시 중앙 공원에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군수 서유민은 현재 청도 지역에서 선정비가 가장 많이 현존하는 인물이다. 재임기간이 1년 7개월임을 감안하면 다섯 달에 한 번 꼴로 건립되었고, 분포 지역도 금천면·화양읍·매전면 등 산동과 산서 모두 세워져 있어 어느 정도 선정을 펼쳤던 지방관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선정비가 요예(要譽) 일환으로 남립(濫立) 현상이 보편화되는 추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선정비만을 기준으로 양리(良吏)로 판단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