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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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𥘼 |
이칭/별칭 | 계화(季華),수암(修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유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서애 유성룡의 아들이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명문가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한 생애를 보냈다.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 거주지는 안동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고, 어머니는 이경(李坰)의 딸이다. 유여의 동생이다.
[활동상황]
유진(柳𥘼)[1582∼1635]은 임진왜란 이후 아버지 유성룡에게서 글을 배우고 29세 되던 해인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장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612년 해서 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 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토지와 세금을 바로 잡았다. 이듬해 형조 정랑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寃獄)[죄 없이 억울하게 옥에 갇힘]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가 크게 감탄하였다.
1627년 2월 9일에 청도 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수포장인(收布匠人)에 대한 보고에 허위가 있다 하여 파직을 당하였다. 부임하던 해에 이중경(李重慶)이 사찬 읍지인 『오산지(鰲山誌)』 편찬을 시작되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1634년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학년(姜鶴年)이 당시 서인 정권의 정책을 크게 비판하여 심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를 두둔하여 대간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임지였던 청도에 인정비(仁政碑)가 세워졌다고 전하나, 현재 청도의 도주관 내에는 전하지 않는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안동 병산 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고관대작을 역임하지는 않았지만 명문가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