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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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光炫 |
영어음역 | Kim Gwa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이다. 할아버지는 김극효(金克孝)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며, 어머니는 권송(權悚)의 딸이다.
[활동사항]
1612년(광해군 4) 생원·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판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재로 뽑혀 연원도 찰방(察訪)을 제수 받았다. 1625년(인조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 및 홍문관 부정자, 예문관 검열·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했다. 이괄(李适)의 난 및 유효립(柳孝立)의 역모사건 때 영사공신(寧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으나 뒤에 개훈(改勳) 때 삭제되었다.
1626년 수찬·교리·암행어사 등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 심열(沈悅)의 종사관으로 기읍(畿邑)에 파견되어 기민구제에 힘썼다. 사간·응교·대사헌·대사간·예조참의 등을 거쳐, 1634년 부제학으로 있을때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옹호함을 임금에게 아부한다 해 탄핵하다가 삼수(三水)로 유배당하였다.
1635년 재이(災異)가 빈발함을 이유로 방면되어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아버지 상용이 강화로 피난했다가 강화가 함락당해 그 곳에서 자살하자, 홍주의 오촌동(鰲村洞)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는 호종(扈從)의 공을 수록하고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 때 모든 문서에 청나라 연호 쓰기를 거부하고 단지 간지만 씀으로써 파직 당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을 배수했으나 사직하였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이 일어나 강씨가 사사되자, 강빈의 오빠 강문명(姜文明)이 사위였던 까닭에 순천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647년 울분 끝에 죽었다.
[저술]
시문집으로 『수북유고(水北遺稿)』 4권이 전한다.
[작품]
강원도 홍천에 있는 홍양 청난비(洪陽淸難碑) 및 강원도 통진에 있는 민기 신도비(閔箕神道碑)와 영상 이탁 묘비(領相李鐸墓碑)가 그의 글씨이다.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