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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302
한자 政治
영어음역 jeongchi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집필자 안성호

[정의]

국가의 주권자가 그 영토 및 국민을 통치하는 행위, 즉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

[개설]

지역적으로는 시민에게 삶의 질 향상과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주민참여 속에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중앙과의 연계속에서 청주시가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일을 추진하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의미한다.

[고대]

흥덕구 송절동의 경사진 지형에서 경사방향을 따라 만든 토광묘는 배수와 묘역의 구획을 위한 시설이었다. 송절동 무덤의 합장 무덤은 그 기원이 우리나라 서북부 지역의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절대연대는 방사선 탄소 연대가 서기 50년~250년, 200년~420년으로 나타났다. 교차되는 연대가 서기 200년~250년에 해당되므로 대략 그 중심 연대는 서기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이 시기 청주지역은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던 낙랑문화의 영향을 일부 받으면서 토착세력 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 무덤의 바닥길이가 6m 84㎝이고 너비가 3m 53㎝나 되는 거대한 무덤이라는 점에서 세력의 크기에 차등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청주지역과 주변 지역에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갔음을 알려주는 유적으로는 청원군 상평리와 진천군 송두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모두 마한과 관련된 유적이며 이 시기 미호천(美湖川) 유역의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국읍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주를 포함한 충북지역은 삼국간의 항쟁기에 중요한 쟁패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다가 소백산맥의 관문인 죽령(竹嶺), 계립령(谿立嶺), 조령(鳥嶺), 추풍령(秋風嶺) 등을 통해 한반도의 요충지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삼국간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중원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 단양 신라적성비(丹陽 新羅赤城碑), 온달산성(溫達山城), 삼년산성(三年山城) 등의 유적지가 이러한 상황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려시대]

청주는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호족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후삼국의 건국세력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궁예(弓裔)왕건(王建)의 정권교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 초기 청주지방의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역사학자들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왕건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청주인들 간의 분열을 야기시킨 이른바 ‘아지태(阿志太)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친왕건파 성립의 계기가 되어 궁예정권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후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간의 930년 고창(지금의 경북 안동) 전투를 계기로 왕건의 세력이 강해지자 충북 일대의 호족세력들도 점차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양국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매곡현(지금의 보은군 회북면)의 성주, 공직(龔直)의 귀부였다. 청주 일대도 고려의 세력권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충남의 홍성과 공주 일대를 점령하면서 고려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983년(고려 성종 2)에 처음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하여 본격적인 통제를 하기 시작했으며 충북을 청주목과 충주목으로 나누어 청주목에 2군 7현을 두었다.

의종 24년 정중부, 이의방(李義方)에 의해 일어난 무신의 난으로 많은 문신들이 무참히 살육당하고 의종(毅宗)이 폐위되었으며 모든 권력이 문신으로부터 무신의 손으로 넘어가 100년간 무인정권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정중부이의방이고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토지를 수탈하고 사치와 방종한 생활을 함으로써 인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청주 출신인 경대승(慶大升)이 26세의 나이로 정중부 부자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3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무신정권기에 중앙 귀족들은 전국적으로 토지를 점탈, 겸병하고 지방 관리들이 농민, 천민들에게 가혹한 수취와 역역동원을 가중시켜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청주인들도 농민 반란군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특히 청주에 속해 있던 향, 소, 부곡의 주민들 대부분이 이 당시 반란군에 합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1393년(태조 2) 11월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을 정할 때 청주는 광주, 충주, 공주, 수원과 함께 양광도(楊廣道) 계수관의 하나가 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를 보면 고려시대보다 소속 군현이 크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려말에 청주목에서 경복흥(慶復興)[?~1380]과 같은 실력자를 배출하였고 조선 개창에 청주에 본관을 둔 정총(鄭摠)[1358~1397], 정탁(鄭擢)[1363~1423]이 개국 1등공신으로, 한상경(韓尙敬)이 3등공신으로 녹훈되어 청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1444년(세종 26)에는 왕이 청주의 초수리 행궁에 4개월 이상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제반 정무가 왕에 보고되어 처리되었으므로 왕이 머무는 동안 청주는 임시 수도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世宗)의 초정 요양을 계기로 청주의 지역적 위상은 크게 높아졌을 것이며 이 지역의 인사들도 중앙의 고관과 지면을 넓힐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이후 1453년(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金宗瑞)안평대군 등을 제거하고 1455년 단종의 왕위를 강탈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때 세조(世祖)의 즉위를 도운 정난공신 43명 가운데 청주권에 본관을 둔 사람이 9명이나 포함되어 청주권 출신세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1등공신에 한확, 한명회(韓明澮), 2등공신에 양정, 홍윤성, 곽연성, 3등공신에 이예장, 설계조, 한명진, 한서구(韓瑞龜) 등이 있다.

[현대]

이승만(李承晩) 독재 정권의 파행적 국정운영에 따른 청주 시민의 정치의식과 정치활동, 자생적인 민주정치의 성장 양상은 1960년 청주농업고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반독재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젊은 학생들의 자발적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충북도민과 청주시민, 대학생들은 4·19혁명대열에 참여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다시금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정치체제를 이끌어갔고 국민들은 일방적인 동원대상이 되었다.

12·12와 5·18을 통해서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는 제2의 군사쿠데타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청주지역도 예외없이 대학생과 종교단체, 노동단체, 그리고 시민들이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였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역사 창조라는 슬로건과 함께 과거청산이 유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항상 유야무야되었고 전시효과적 수준의 성과만을 남겼다. 청주 출신의 정치지도자가 전국적인 지도자로 출현하기 힘든 것도 이러한 한국의 지형과도 무관하지 않다. 청주의 정치지도자는 호남정권이나 영남정권이 만들어주는 자리에 만족하거나 수동적으로 편승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하의 문민정부 시기에 청주의 지역정서는 단순한 여당지향적 행태를 벗어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영·호남에 형성된 지역갈등적 정치구도가 여권 엘리트연합의 붕괴로 무너지고 충북이 새로운 정치권으로 독립하였는데, 이는 한국정치의 갈등구조가 시장민주주의적 패턴으로 진행해가는 조짐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청주인들의 새로운 의사표현은 또 다른 지역구도의 심화와 함께 지역적 정치문화를 강화시키는 고질적 문제로 남게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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