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읍지
-
관청이나 고을에 과거 부임하였던 전임관, 수령 등 벼슬아치의 명단.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과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관직명·생년·본적·취임 및 이임시기(移任時期)·치적(治績) 등을 적어놓은 책으로 일명 『안책(案冊)』이라 하기도 하고 흔히 지방에는 「수령안(守令案)」이라고 하여 명단이 전하고 있다. 작성 시기를 기준해 볼 때 등재 인물이 현임자의 전임자(前任者)라는 데...
-
1740년 이후 영조(英祖) 시기에 저술한 것으로 보이는 『청주읍지(淸州邑誌)』. 조선 후기 영조(英祖)[재위1724~1776] 때 청주의 역사·인문(人文)·지리적 내용을 총괄하여 기술한 『청주읍지(淸州邑誌)』로 필사본(筆寫本)이다. 표지 제목을『낭성지(琅城誌)』라 했으며, 제1장 첫째 줄에 읍지(邑誌)라 기록했다. ‘낭성(琅城)’은 청주를 일컫는 이름중의 하나이다. 내용을 통해...
-
충청북도 청주지역에 있었던 서원. 1479년(성종 10)에 청원군 옥산면 금계리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최초 창건당시에는 서원이 아닌 사당의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곡수리에 건립되어 이름을 곡수서원이라 하였다고 한다. 유서와 연혁이 매우 애매한 서원으로, 서원관련 여러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헌종대 편찬된 『청주읍지(淸州邑誌)』에 ‘곡수성신사...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봉명사거리 북서쪽 부근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수리시설. 과상이란 주변에 과일 상점이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봉명사거리 북서쪽 부근에 있었던 수리시설로 영조 때 만들어져 최근까지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지명만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주치(州治)에서 서(西)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위가 1,...
-
조선시대 청주목사. 김의순은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아가 청주목사를 지냈다. 읍인(邑人)이 사우를 세우고 초상을 봉안했다고 『청주읍지(淸州邑誌)』(헌종대 편찬)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사우는 남아있지 않다....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관(仲觀)이며, 휘숙(輝叔)이다. 아버지는 박천구(朴天龜)로 제릉(齊陵)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형 박태헌(朴泰獻)과 동생은 박태영(朴泰榮), 박태업(朴泰業)이 있다. 1666년(현종 7)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청주읍지(淸州邑誌)』에 의하면 박태장(朴泰章)의 묘는 서강외이면 신원(薪院)에 있다고 한다. 현재 충...
-
충청북도 청주의 상당산성에 주재하였던 종3품의 무관. 병마절도사를 보좌하고 상당산성에 주재하면서 산성의 운영을 관리, 책임졌던 무관직이다.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제도가 정립되면서 그 막료로서 도진무(都鎭撫)가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1466년(세조 12)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개칭되었다. 1651년(효종 2) 충청남도 서산의 해미(海美)에 있던 병영(兵營)을 청주...
-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 즉, 무덤. 분묘란 흔히 묘 또는 무덤이라도 하고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임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장소나 시설로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을 고분이라 한다. 분묘는 각 사회의 장제(葬制)나 또는 내세관과 깊이 관련되어있다. 또 자연환경이나 생업형태, 피매장자의 연령과 성별,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이르기까지 분묘의 형태와 습속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
현재의 봉명동 799~801번지 부근에 있었던 조선시대 수리시설. 현재의 봉명동 799~801번지 부근에 있었던 수리시설로 『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주치(州治)에서 서(西)로 5리 떨어진 곳에 있고, 주위가 552척이며 수심이 2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봉명동 사거리 남동쪽 기슭의 봉명파크장 주변에 있었으며, ‘소댕이방죽’이라 불FL다가 1983년 주변이 택지 지역으로...
-
충북 청주시 상당구 동편에 위치하는 청주의 진산이며 문화유적의 보고. 청주시의 동편에 위치하는 우암산(牛岩山)[338m]은 청주의 진산(鎭山)으로 청주시의 명암동, 내덕동, 우암동, 수동, 대성동, 문화동, 용암동에 걸쳐 있고 그 지맥이 탑동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해발 338m의 정상을 중심으로 남과 북 3좌의 연봉과 중앙초등학교 동쪽의 당산(唐山)에까지 이르...
-
옛말, 오랜 생활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과 지혜를 간결하고도 비유적으로 형상적인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구비단문의 한 형태. 속담은 표현과 기능에 따라 격언(格言)과 이언(俚諺)으로 나눌 수 있다. 격언은 사회·역사적인 경험이 정식화된 것으로서 실천적인 규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격언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문장을 이루고 있으며 대개 교훈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 격언은 서술문,...
-
(1)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東萊 府使 宋象賢 忠烈祠)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5에 위치한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동래부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선조 28년(1595) 동래에 있던 묘소를 지금 위치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
-
조선시대 청주 율봉역에 속한 역. 『청주읍지(淸州邑誌)』에 의하면 율봉역에 속한 역으로 청주에서 남쪽 16리에 있고, 역로는 청주율봉역-쌍수역-율치(栗峙)-문의 덕류(德留)역-형강(荊江)역, 주안(周岸)역-옥천 증약(增若)역으로 이어진다. 쌍수역에는 역리(驛吏) 40명, 역노(驛奴) 10명, 역비(驛婢) 7명이 있고, 상등마(上等馬) 4마리, 중등마(中等馬)...
-
충청북도 청주에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기관인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관리. 역참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참은 군사·외교 외에 중앙집권을 유지하기위한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참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로의 조직과...
-
조선시대의 숙박시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인제원은 청주성 남쪽 6리에 있다.’라고 되어있고, 『청주읍지(淸州邑誌)』에는 ‘고을남쪽 6리에 있다. 16개의 원(院)이 옛날에 있었다. 옛터의 옆에 창(倉)을 세우고 객사를 두었다. 지금은 모두 폐하고 다만 신원(薪阮), 오근(吳根)이 사성(使星)을 보내고 맞는 장소이다.’고 한다. 현재 흥덕구 분평동 원...
-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는 한씨의 시조인 한란의 묘소.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씨족 중의 하나이며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은 청주지역의 대표적 호족으로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봉해지고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
-
조선시대 청주관아(官衙)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 읍성은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로서 가장 오래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신라 685년(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689년 윤(閏) 9월 26일에 서원경성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아마도 통일신라가 구주오경제(九州五京制)를 갖추던 신문왕대...
-
청주 주치(州治)의 서문(西門) 밖에 있던 군인을 사열하던 장소. 현재까지 치부당(治賦堂)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려진 기록이 없다. 즉 치부당이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 건물이었는지 등, 현재 청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유적 혹은 유물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발간된 『청주읍지(淸州邑誌)』에 기록되어...
-
역대 청주의 사정을 기록한 지리지. 지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전근대 시기 중앙집권적 수취체제의 기초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도·시·군지, 마을지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사정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전근대 시기의 향토지는 주로 중앙의 관 주도로 이루어진 수취를 위한 지방의 사정을 기록한 지리지에서 비롯된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지방자치단체 주도의 기획과 편찬이 이루어져 보다 자...
-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洲)이다. 청주 판교리(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를 근거지로 한 남양홍씨 집안의 인물이다. 아버지는 홍이정(洪頤正), 할아버지는 홍순각(洪純慤), 증조할아버지는 홍해(洪瀣), 외할아버지는 남충원(南忠元), 장인은 김발이다. 아들로 홍일우(洪一宇) 등 4형제를 두었고, 동생으로 홍석주(洪錫周)가 있다...
-
화죽들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수리시설. 화죽제언은 청원군 북이면 화상리와 화하리에 발달된 화죽들에 만들어진 제언으로 화죽들은 석화천과 미호천(美湖川) 사이에 발달된 들이기 때문에 홍수로 여러 번 유실되었다. 이에 제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1760년(영조 36)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청주목의 63개 제언 중 화죽제언이 중요한 제언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