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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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邑城戰鬪 |
영어음역 | Cheongjueupseong Jeontu |
영어의미역 | Cheongjueupseong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신영우 |
[정의]
충청북도 청주성에서 동학농민군과 진남영의 병사들 사이에 있었던 싸움.
[개설]
1894년 10월 16일 동학 교주 최시형이 기포령을 내린 후 청주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10월 22일에 청주성을 포위 공격해서 10월 27일까지 성내의 진남영 병정들과 치열하게 전개한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1894년 10월 16일 동학 제2세교주 최시형은 기포령을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내렸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해서 야기된 국가의 위기를 동학교도들이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기포령은 동학 교단이 모든 교도들에게 무장봉기를 지시한 것으로서 이에 따라 전국의 동학 조직은 즉각 봉기에 나섰다.
[발단]
청주의 동학교도들은 대접주 손천민(孫天民)과 서장옥의 지휘를 받아 청주성 점거를 계획하였다.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청주성을 기습한 날은 10월 22일이었다. 그러나 청주성의 기습 점거는 성공하지 못했다. 청주성은 병사 이장회(李長會)가 지휘하는 진남영 병정들이 근대 무기인 스나이더소총으로 무장하고 완강히 지켰기 때문이었다. 병영이 없었던 경상도의 대읍인 상주와 선산이 같은 시기에 동학농민군에게 점거 당했던 것과 비교된다.
[경과]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읍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진남영 병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원병을 기다렸다. 청주병사 이장회가 양호도순무영과 충청감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급보를 잇달아 보내서 청주는 동학농민군의 2차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경군과 일본군의 중요한 목적지가 되었다.
순무영의 독촉을 받고 청주로 직행한 경군은 안성군수 성하영(成夏泳)이 지휘한 경리청 병대와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이 인솔한 장위영 병대였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증파된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중로군도 청주로 직행하였다. 그렇지만 구원병이 도착하기 이전에 진남영 병대는 반격에 성공하여 자력으로 청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읍성에서 물러난 동학농민군은 육거리에서 무심천(無心川)을 경계로 진남영 병정들과 여러 날을 대치하고 있었는데 청주병사 이장회가 무심천(無心川)의 폭이 좁은 곳으로 우회해서 남들 입구에 모여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결과]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수십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 청주읍성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것은 서울로 북상하는 요충지 장악에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 남접의 전봉준군은 공주를 거쳐 북상하려다가 우금치공방전에서 패배하였고, 김개남군은 다시 청주 공격을 시도하다가 패배하였다. 청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급파되었던 경군과 일본군은 보은, 옥천, 영동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