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김화 백전 전투에서 6·25전쟁, 오성산 상감령 전역까지 국난극복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05
한자 丙子胡亂金化栢田戰鬪-六二五戰爭五聖山上甘嶺戰役-國難克復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정의]

병자호란 김화 백전 전투에서 6·25전쟁 오성산 상감령 전역까지 철원군 김화 지역 주민들의 국난 극복사.

[개설]

철원군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의 길목이라 외적이 침입하거나 분단 시대에 철저하게 유린당하였다. 멀리는 삼국 시대에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100년 간격으로 번갈아 점령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1951년 봄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될 때까지 전선은 고착된 채 고지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이는 제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백마고지 전투화살머리고지 전투 그리고 저격능선 전투금성지구 전투는 철원군 일대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한 전투이다. 당시 미 8군의 제임스 밴 플리트 사령관은 북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아군 입장에서는 탈환하기가 너무 힘들고, 지도에서 평강·철원·김화를 이으면 삼각형 모양이 되어 ‘철의 삼각지’라고 표현하였다.

한편 고려 시대 몽고군 침략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는 외적의 침입에 맞서 철원군 철원읍 소이산김화읍 성재산 일대에서 항전하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에서 벌어졌던 대표적인 전투가 병자호란 당시 김화 백전 전투이고 6·25전쟁 당시 저격능선 전투[상감령 전역]이다. 두 전투 모두 오성산 바로 앞에서 벌어졌고 상대방은 청군과 중공군이어서 모두 중국이었다. 1637년과 1952년 약 300여 년 사이에 벌어졌던 두 역사적인 사건의 실상을 파악하여 우리 선조들의 국난 극복사를 재조명한다.

[병자호란 김화 백전 전투 재조명-김화 백전 전투의 시작과 끝]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에서 지뢰 지역을 지나고 윗마을 중간쯤에 이르면 좌측 오솔길로 접어들 수 있다. 오솔길을 200m가량 걸어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넓은 개활지가 전개된다. 2~3㎞에 걸쳐 펼쳐진 논밭 뒤로 낮은 산들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고 산의 좌측에 병자호란 당시 청(淸)나라 군대에 맞서 이곳 김화 백전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耈)[1596~1637]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그 뒤로 남방한계선과 맞닿아 있는 성재산(城齋山)[471m]이 보이고, 그리고 저 멀리 북녘 땅인 오성산(五聖山)[1,062m]도 한눈에 들어온다. 논둑길을 따라 충렬사 쪽으로 500m가량 걷다가 중간에 서서 사방을 삥 둘러보면 이곳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 지역임이 실감난다. 옛 김화군 중심지인 읍내리 시내 쪽인 동쪽 방향으로만 터져 있을 뿐 사방이 막혀 있다. 이런 표주박 모양 분지 지형이 전통적으로 명당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서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것은 맞지만, 전투 상황에서는 퇴로가 막힌 독안에 든 쥐가 될 수 있는 폐쇄적인 지형이다.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김화 백전 전투가 벌어진 한복판이었다. 충렬사가 위치한 곳이 1637년 1월 28일 홍명구 공이 전사한 곳이고, 남쪽의 산지 구릉지대는 같은 날 청나라 군대에 맞서 평안도병마절도사 유림(柳琳)[1581~1643] 장군이 승리한 곳이다. 조용히 눈을 감으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나섰던 선조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인조 14) 12월 8일 청나라가 13만 병력으로 조선을 무력 침공한 전쟁이다. 병자호란은 청의 일방적인 제압으로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포기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삼밭나루]에서 치욕적으로 군신(君臣) 관계 내용이 주가 된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체결하며 종식된 전쟁이다. 개전 초부터 다수의 기병(騎兵)을 보유한 청군의 빠른 진격 속도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남한산성에 들어가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함락, 주전·주화파의 대립, 장기전으로 인한 군량 부족 등으로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은 국가 위란의 기간 중에 전국 각도에서 모집된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모여들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김화 백전 전투는 병자호란 종반부인 1637년 1월 28일 남한산성을 지원하기 위해 남진(南進)하던 평안도 근왕군과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당시 홍명구 평안도관찰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2,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청군의 침입을 최전선인 평안도에서 조기에 차단하지 못한 홍명구 감사는 죄책감에 울며 탄식하였다. 홍명구가 이끄는 2,000명의 병사와 유림이 이끄는 3,000명 등 5,000명의 평안도 근왕군은 김화에서 4차례에 걸친 청과의 전투에서 약 3,000명의 청군 희생자를 내고 승리하였다. 한편 김화 백전 전투에서 홍명구 감사는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유림 장군은 승리한 후 다음 날 군대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홍명구 감사와 유림 장군이 지휘한 김화 백전 전투는 용인 광교산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2대 승첩(勝捷)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민통선 내에 위치하여 실제 전투 지역을 비정(比定)하는 데 제한적이었고 연구 성과도 미진하였다. 2012~2013년 병자호란 김화 백전 전투에 관한 학술대회가 열리고 2013~2014년 DMZ생태평화공원이 조성되면서 김화 백전 전투의 역사적 의미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병자호란 김화 백전 전투 재조명-김화 백전 전투와 화강백전]

유림 장군이 싸웠던 백전(栢田)은 현재 충렬사에서 남쪽으로 건너 마주 보이는 낮은 봉우리와 그 능선 일대이다. 당시 유림 근왕군이 김화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전투가 일어났으므로 숙박 시설이나 부대시설 등을 조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목책을 겹겹이 쌓고 전투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금강산 가던 길에 이곳에 들어 「화강백전(花江柏田)」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화강은 김화의 옛 지명이고 백전은 밀식된 잣나무를 뜻한다. 성리학자이기도 했던 겸재는 음양조화를 꾀하면서 청나라 군대에 맞선 근왕군들의 충성심을 그림에 담았다. 빽빽하게 하늘로 향해 쭉쭉 뻗은 잣나무는 당시 전투에 임하였던 근왕군의 충만한 사기를 의미한다. 김화 주민들은 1645년 홍명구 충렬비를 세우고, 1650년(효종 1)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1652년 효종이 ‘충렬사’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賜額) 사당이 되었다.충렬사6·25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위치가 남방한계선에 있어 1975년 근남면 육단2리에 재건하였고, 그 후 1997년 현 위치로 옮기었다. 1940년 김화 유생들의 합의에 따라 유림 장군을 충렬사에 같이 제향하기 시작하였으며, 1997년 강원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었다. 홍명구 장군에게는 병자호란 직후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다른 지방 수령들과 달리 홍명구는 국가와 왕을 위하여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김화 백전 전투를 벌여 그 공이 널리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유림 장군에게 시호가 내려진 것은 전투가 끝난 지 159년 뒤인 1796년(정조 20)에 이르러서이다. 사실 조정에서는 유림 장군의 공을 평가하는 데 인색했다. 그래서 국가[김화현]가 아닌 김화 주민들은 유림 장군의 혁혁한 공을 기리기 위하여 1644년(인조 22)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향교골]에 유림 대첩비를 세웠다. 유림 대첩비는 현재 충렬사 앞으로 옮겨져 홍명구 충렬비와 함께 모셔져 있다. 전골총(戰骨塚)김화 백전 전투에서 전사한 1,000여 명의 홍명구 근왕군 무덤으로 전해 오고 있는데, DMZ 남방한계선 안에 있어 군부대의 사전 출입 허가를 받아야만 드나들 수 있다.

[저격능선 전투와 상감령 전역]

[중국 관점에서의 상감령 전역]

전쟁 관련 신문보도를 정리하다 보면 승리에 대한 기록만 있지 패배한 기록은 거의 없다. 전시 상황에서 국민과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기록은 모두 뺀 것이다. 그래서 6·25전쟁 당시 철원[김화]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상황을 객관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란 매우 어렵다. 한 가지 전투를 놓고 서로 승리하였다고 상반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치열한 고지전으로 치달을 무렵인 1952년 10월 중순경 김화 동북방 오성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도 그러하다. 중국에서는 오성산 일대 전투 참가자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웠으며 그 활약을 기리는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가 백악관 국빈 만찬에서 연주되었는데 그 노랫말에는 미군을 승냥이와 이리로 비하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 전투를 중국에서는 ‘상감령 전역(戰役)’이라 부른다.

6·25전쟁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투를 꼽으라면 보통 한국인은 백마고지 전투와 다부동 전투를 떠올리고 미국인은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를 떠올리며 중국인은 예외 없이 상감령 전투를 기억한다. 중국은 1952년 하반기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상감령에서 의지와 끈기로 버텨 내 결국 북한을 지켜 내는 데 성공하였다고 자부한다. 중국의 상감령 전투를 한국은 저격능선 전투라 말한다. 우리의 저격능선 전투는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남쪽 저격능선에서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 국군 2사단이 중공군 15군과 치열한 격전 끝에 아군이 승리한 전투’이다. 같은 전투를 놓고 양측이 모두 승리한 셈이다. 무슨 문제가 있을까? 일단 전투 범위가 다르다. 중국의 상감령 전투는 우리의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포괄한 개념이다. 철원 오성산(五聖山)[1,062m]과 화강[남대천] 사이에는 상감령과 하감령 2개의 고개가 있다. 두 고개 사이에 남북 방향으로 산줄기가 2㎞ 간격으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이 삼각고지[598m]이고 동쪽에 있는 것이 538고지이다.

[국군과 유엔군 관점에서의 고지전과 저격능선 전투]

538고지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고지군이 한국에서 저격능선, 미국에서 스나이퍼 리지(Sniper Ridge)라고 부르는 능선이다. 저격능선 전투는 1952년 가을철로 접어들면서 북한군과 중국군이 대대적인 진지전을 전개하자 한국군과 유엔군 측에서도 전투력의 위세를 보이기 위하여 국군 2사단으로 하여금 김화 북방의 저격능선을 탈취하도록 한 공격 전투이다. 타 전투와 달리 저격능선 전투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전에 아군이 먼저 공격하였다. 아군 입장에서는 적의 주거점인 오성산을 위협하는 데 꼭 필요한 중요 접근로상의 요충지였다. 오성산 부근 중공군 전초 가운데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2개소를 목표로 선정하여 국군과 유엔군 1개 대대가 각각 1개 목표를 탈취하도록 하되 군단의 화력과 항공 근접 지원을 최대로 투입하여 단기간에 종료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작전은 아군이 공격 작전을 감행할 능력이 있다는 ‘힘의 과시’라는 의미에서 ‘쇼다운(Showdown)’ 작전이라고 명명되었다.

저격능선(Sniper Ridge) 전투 경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1952년 10월 초 소규모 공격으로 중공군의 기선을 제압할 생각으로 공격을 준비하였다. 미 7사단은 삼각고지,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이 목표였다. 미 8군은 소규모 고지였기 때문에 큰 피해 없이 단기간에 공격이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실제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특히 미 언론이 “큰 의미도 없는 전투에서 많은 미군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보도하는 바람에 여론이 좋지 않았고 결국 미 7사단은 작전 개시 12일 만에 삼각고지 탈환 임무를 국군 2사단에 인계하였다.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에 더해 삼각고지에서도 격전을 치렀으나 고지 전체를 완전히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아군은 11월 5일 삼각고지에서의 작전을 중지하고 저격능선 방어에 주력하였다.

[상감령 전역과 영화 「나의 조국」]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 원조 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른다.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이다. 전쟁이 교착 국면으로 전개되던 1951년 8월부터 중국은 고지 후사면에 땅굴과 참호를 파고 난공불락의 지하 요새를 구축하였다. 중국의 지하 만리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상감령 전역이었다. 삼강령 전역 전황은 종군기자들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하여졌다. 중국 정부는 실제 상황보다 부풀렸고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오성산 일대에는 지금도 6만 명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 만리장성이 있다고 한다. 철원군 김화 동북방 최전방인 생창리 DMZ생태평화공원 십자탑 전망대와 근남면 마현리 승리전망대에 올라가면 오성산, 상감령, 저격능선이 또렷하게 보인다. 철원군은 이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이고 중국인 관광객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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