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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068
한자 錦山里
영어음역 Geumsa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영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금산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49년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금산리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금산리로 개편
법정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6.7㎢
가구수 423가구
인구[남/여] 624명[남 382명/여 242명]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금무산(錦舞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금산이라 이름 붙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칠곡군 노곡면(蘆谷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대곡, 저동, 강창 등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산동이라 하고 왜관면에 편입하였고, 1949년 왜관면이 왜관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금산리는 5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한실(漢實)[대곡(大谷)] 마을은 정조(正祖) 때 광주인(廣州人) 이도중(李圖中)·이서중(李書中) 형제가 상지면 창평에서 옮겨 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금무산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이어서 한실 또는 대곡이라고 하였다. 강창(江倉) 마을은 『경산지(京山誌)』 고적조(古蹟條)에 칠곡부 노곡방(蘆谷坊)에 왜관(倭館) 옛터가 있어 일본 사신들이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상경 시 유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알 수 없다.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운반된 화물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던 곳이어서 강창이라 하였다.

딱실[저동(楮洞), 저곡(楮谷)] 마을은 고려 후기인 공민왕(恭愍王) 때 서해도(西海道) 부사를 지낸 청주인(淸州人) 한방도(韓方道) 장군과 절개와 지조가 있는 절부(節婦) 배씨가 예전에 살았다는 『경산지』의 기록으로 미루어 약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닥나무[楮]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야디기[야덕(野德), 야득(野得), 야곡(野谷)] 마을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한양인(漢陽人) 조절(趙節)이 계유정란 때 성주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중 장가를 들어 처가에서 상속받은 토지를 따라 정착하였다고 한다. 처가에서 상속 받은 재산이 들[野] 하나뿐이어서 야디기라고 하였다. 두무실[두뭉골, 두무리(斗舞里), 두무동(杜霧洞)] 마을의 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옛날부터 형용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자연 환경]

금산리는 왜관에서 동남쪽 약 4.5㎞에 위치한 금무산을 동남으로 두고 그 줄기가 동서로 뻗어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서쪽으로 낙동강이 남으로 흐르며 그 강을 따라 들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2013년 12월 현재 금산리의 면적은 6.7㎢이며, 인구는 423가구, 624명으로 남자가 382명, 여자가 242명이다. 금산리금무봉 북쪽에는 왜관 산업 1단지왜관 산업 2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한실 마을 전체가 왜관 산업 1단지로 조성되어 주민들은 모두 삼청리 장다리로 옮겨 갔다. 농경지와 마을 일부가 산업 단지로 수용되면서 금산리 대부분 마을이 산업 단지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요식업, 주유소 등의 상업 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왜관읍과 대구광역시를 잇는 4차선 도로가 낙동강을 따라 남북으로 지나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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