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수리 농요
-
박장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마수리의 대성(大姓)인 운봉박씨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신석 이장인 이유성 씨가 한문 공부도 많이 했고 보학에도 밝은 분이 박장석 씨라고 말하면서 그를 추천했다. 사실 마수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운봉박씨의 유래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만들기 때문이다. 박장석 씨를 만나 운봉박씨가 고려 말에 시작되었다는...
-
농요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 의해 불렸고 전승되어 온 구전문학이자 음악이다. 이들 농요는 내용적으로 농사의 어려움, 삶의 애환, 역사적인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의 동작을 맞추고 노동의 어려움을 잊기 위해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농요는 입으로 불려 전해지므로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수리 농요는 남한강 유역...
-
농악대는 꽹과리를 치는 상쇠가 이끌어간다. 그리고 부쇠가 상쇠의 리듬에 맞춰 박자를 맞춰 간다. 새납으로 불리는 태평소는 농악에서 유일한 관악기로 가락을 담당한다. 최근에는 태평소를 부는 사람이 없어 태평소 없이 농악을 운영하기도 한다. 사물 중 나머지 셋인 장구와 북 그리고 징은 기본이 2명씩이다. 이중 북은 4명이 치는 경우가 많으나, 상황에 따라 3명이 되기도 한다. 농악대:...
-
마수리 농요는 크게 3부로 이루어진다. 1부가 고사덕담이고 2부가 마수리 농요이며 3부가 여성 노작요이다. 1부 고사덕담을 시작하기 위해서 마수리 농악대가 먼저 농요 대원을 이끌고 입장한다. 이때 꽹과리를 두드리며 농악대를 리드하는 상쇠가 바로 유진형 씨이다. 그는 1995년부터 지금까지 마수리 농악대의 상쇠를 맡고 있다. 그는 타고난 악사이다. 두마치 세마치 군악장단...
-
박기서(초대 마수리 농요보존회장) 씨는 1972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수리 농요가 1969년 방송을 탔다면, 1971년부터 1972년까지는 마수리 농요가 공개석상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박기서 씨의 기록에 따르면 1971년부터 충북도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72년 10월에 제13회 전국 민속예...
-
여성 노작요가 생긴 것은 1973년이다. 그해 10월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가 청주에서 열렸는데, 전년도 대통령상 수상팀이 식전 행사로 공연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팀의 구성이었다. 1972년에는 마수리 농요팀을 중심으로 국악협회팀과 영동여고팀이 하나의 단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지남기 선생은 마을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여성 노작요팀...
-
마수리 농요의 명인 지남기(池南基)[1926~2005] 선생은 1926년 4월 10일 괴산군 불정면 웅동리[웅골] 274번지에서 아버지 지현덕 씨와 어머니 남궁순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이웃하고 있는 외령리 잿말(영촌 본동)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24세 되던 1949년 당시 19세이던 김금순[1931~ ] 씨와 결혼하였다. 김금순 씨는 충주시 살미면...
-
박재석[1955~ ] 씨는 마수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농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농악놀이에 직접 참여한 것은 16살 때인 1970년이라 한다. 당시 4-H 경연대회에 농악 부문이 있어서 지남기 선생의 지도로 대원들과 함께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니면 화안리에 있던 산수초등학교에서 5월 5일 단오제가 열리곤 했는데 그때도 역시 팀을 구성 농악연습을...
-
마제는 마수리의 중심마을이다. 마제리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여지도서』(1760)이다. 그리고 이후 발간된 인문지리서에서 마제리는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마제리라는 이름이 마수리로 바뀌었지만 마제는 인구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여전히 마수리의 중심 마을이다. 더욱이 마수리 농요가 1972년 전국 민속...
-
최종남[1957~] 씨는 현재 남편 박경석 씨와 함께 논농사도 짓고 젖소도 키운다. 젊은 시절에는 논농사를 80마지기씩이나 지었다고 하니 대단한 여성이다. 요즘도 젖소를 키우느라 아침과 저녁에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저녁 6시에 시간을 내서 1시간가량 마을회관에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이종순[1931~ ] 씨가 함께 하면서 마수리 농요에...
-
마수리는 충주시 신니면 14개 법정리 중 하나이다. 본래 충주군 신석면(新石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니면(薪尼面) 마수리(馬水里)가 되었다. 마수리라는 이름은 당시 가장 큰 마을이었던 마제동(馬蹄洞)과 온수리(溫水里)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들었다. 마수리는 신니면 용원리의 남쪽, 신니면 견학리의 서쪽, 주덕읍 대곡리의 북쪽에 자리 잡고...
-
마제 이장 박용기(46세) 씨는 현재 다섯 가지의 일을 하고 있다. 마을의 이장이고, 농요보존회 총무이고, 운봉박씨 충주파의 총무이고, 정미소의 주인이고 농사를 짓는 농군이다. 정미소와 농사일은 가업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마을일, 농요보존회의 일, 종친회의 일은 좋든 싫든 맡게 된 일이다. 그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게 된 것은 사실 그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고...
-
유진형 씨는 마수리 농요보존회원 중 두 번째로 지남기 선생을 잘 아는 사람이다. 1943년에 중원군 살미면 문화리 2구에서 태어난 유진형 씨는 음악적인 재질이 있는지 어릴 때부터 농악대를 쫓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청년이 되어 꽹과리도 잘 두드리고 장구도 잘 치고 상모도 잘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농악놀이나 무당의 푸닥거리에는 빼놓지 않고 구경을 가거나 참여했다고 한다....
-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에서 풍년을 기원하며 부르던 노동요. 「중원 마수리 농요」는 조상들이 농사를 지을 때 풍년을 기원하며 불렀던 벼농사노래이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그 자체가 잊혀져가던 것을 지난 1970년대에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마제마을 사람들에 의해 재현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94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
중원 마수리 농요보존회는 1995년 1월에 생겨났다. 1994년 12월 30일 마수리 농요가 충북 무형문화재 제5호가 되면서 충청북도로부터 지원금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관리할 단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95년 1월9일 처음으로 기능보유자인 지남기 씨에게 30만원, 보존회에 10만원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전수생을 지도 육성하면 그에 맞는 전승 보조금도 지원할 수...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매년 중원 문화와 관련하여 열리는 학술 행사. 중원 문화라는 말은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권 지역에 형성되었던 역사·문화·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보통 중원이라 하면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과거 통일신라시대부터 나라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중원경, 중원소경 등의 지명으로 사용됐...
-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는 현재 중요 민속자료인 중원 농요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이 농요(일명 탄금대 방아타령)는 1972년 제13회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 때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또한 마수리 농요는 1994년 충북 무형문화재 제5호가 되었으며, 이를 원형대로 보존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매년 시연을 하고 있다. 충주 마수리 농요(忠州 馬水里 農謠) 또는...
-
지남기 선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박기서[1932~ ] 씨이다. 1953년부터 지남기 선생과 친교를 맺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지남기 선생과 함께 마수리 농요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72년에는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지남기 선생의 메김 소리를 받기도 하고 후렴구를 부르기도 하면서 마수리 농요를 전국적인 무형문화재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