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충주와 개신교와의 만남은 서울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길목과 무관하지가 않다. 길은 곧 사람과 문물, 그 모든 것의 흐름이자 통로이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 충청도는 남도와 경상도 그리고 서울을 잇는 길목으로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경기도 과천~시흥~수원~성환을 거쳐...
-
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용탄동·종민동에 걸쳐 있는 산. 원래 이름은 심항산(心項山) 또는 오동산(梧桐山)·계족산(鷄足山)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동나무가 무성했기 때문에 오동산이라 했고, 백제시대에 지네[百足蟲]가 많아 퇴치하기 위하여 닭을 한 무리 방목하니 백족충이 없어져서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1958년에 계명산(鷄鳴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해발...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산줄기를 이루는 봉우리들 사이의 낮은 능선부. 한반도는 오랜 기간 동안 변성을 받거나 마그마의 관입으로 더욱 단단한 지각으로 구성된 안정 지괴에 속한다. 게다가 남동에서 북서로 미는 태평양판을 비롯하여 남쪽에서 밀려오는 필리핀판, 동쪽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온 동해 지각의 확장 등 다양한 방향의 횡압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왔다. 이...
-
기원 전후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역사와 문화.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한반도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었으며, 70여 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 백제와 신라도 각각 백제국(伯濟國)과 사로국(斯盧國)이란 이름의 소국으로 등장하여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사회는...
-
충청북도 충주시 금릉동에 있는 구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덤과 구덩 유구. 금릉동 유적은 충주역에서 목행동 방면으로 가다가 나오는 청주세무서 자리에 위치한다. 해발 100m 정도의 구릉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이어진 능선의 북쪽 부분에 분포한다. 낮은 구릉 서쪽으로 칠금동 앞뜰이 넓게 펼쳐져 있다. 1998년 충주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 조사...
-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립된 최초 금융기관. 농공은행은 1906년 농업과 공업의 개량 발달을 위해 설립된 은행이다. 당시 정부에서는 지방 금융의 핍박을 우려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 정부 창고를 건설하고 미곡의 담보 대부, 부동산의 담보 대부를 행하였다. 그러나 그 시설이 응급적·과도적인 것에 불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 자원도 빈약하여 지방 금융을 완화하는 데...
-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대길삼지(大吉三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대길삼지」는 동량면 하천리 만지마을에서 전승되고 있는 풍수전설이다. 만지마을은 780m 높이의 옥녀봉 산하에 있는 ‘만지(晩知)’, ‘독지(獨知)’, ‘무등(無等)’이라 불리는 길지 중의 하나인데, 이를 발견한 인물은 토정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라고 전해진다...
-
조선 후기에 공납제(貢納制)를 폐지하고 대신해서 제정·실시한 재정제도. 대동법은 조선 전기 조세제도 중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세납(稅納)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제도이다. 즉 조선 전기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형태로 운영되던 공납제는 방납(防納)의 성행, 지주제의 확산, 공납제 부담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큰 폐단을 야기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관리들 명부. 조선시대 내외 관서와 관직명을 기록하고 해당 관리의 이름을 오려붙여 중앙에서 각 관서와 지방의 관리 현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서첩이다. 조선시대에 중앙부처와 지방의 관직 명단을 파악하기 위하여 의정부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각 지방별로 총민호(總民戶)·장부전답(帳簿田畓)·군액(...
-
국원성은 고구려가 평양 천도 후 남진을 계속하여 5세기 전반 충주 지역을 점령하고 설치한 수도 다음 가는 부도(副都)였다. 고구려의 남방 경영 책원지이자 신라 공격의 전초기지였다. 충주 고구려비는 이러한 고구려 남진 정책의 성공을 기념하는 비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여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한 것은 충주...
-
속가가 충남 공주라 하며 구체적 지명은 슬쩍 피한다.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의외로 담담하게 출가 동기를 밝힌다. 성관 스님은 9남매의 3째 아들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이 힘들다고 하시고 어머니는 그래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을 중학교 때 우연히 엿듣고 학교를 안가고 촌에서 농사일을 거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님...
-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이 속한 지방 행정구역. 지방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지방의 주와 군, 현을 잘 다스리기 위해 제정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 56, 지(志) 제10 양광도조에, “양광도는 원래 고구려와 백제 땅이다.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양주(楊州)·광주(廣州) 소속 주·현은 관내도에, 충주·청주 소속 주·현은 충청도에, 공주·운주 소속...
-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이 속한 지방 행정구역. 지방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지방의 주와 군과 현을 잘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 56, 지(志) 제10 양광도조에 “양광도는 원래 고구려와 백제 땅이다. 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양주(楊州)·광주(廣州) 소속 주·현은 관내도에, 충주·청주 소속 주·현은 충청도에, 공주·운주 소속 주...
-
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에서 어림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충주시 안림동에는 ‘대궐터’라고 불리는 어림마을이 있다. 백제 문주왕이 이곳에 왕도를 정하고 공사를 할 때 솔밭에다 가행궁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어림(御林)이라 하였고, 그 후 마을 이름을 어림이라 부르게 되었다. 1959년 중원군청에서 간행한『예성춘추』에 수록되어 있다. 1981년...
-
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
-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1910년 8월 한국병합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의 조선 침략이 완성되었다. 일제는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더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1910년 10월부터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식민지 지배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정책은 시대에 따라 다...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 역사. 조선시대 충주는 1395년(태조 4) 지방제도가 개편된 후 충청감영의 소재지이면서 목(牧)으로서 대원(大原)·예성(蘂城)으로 불렸다. 관내의 호수는 1,871호이며, 인구는 7,452명에 이르고, 시위군 440명과 선군(船軍) 465명이 있는 대읍이었다. 1458년(세조 4)에 충주진(忠州鎭)이 설...
-
조선 후기 충청감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성경(成卿)·태성(台城), 호는 정헌(靜軒)·대릉(大陵). 증조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조태채(趙泰采), 할아버지는 조겸빈(趙謙彬),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조영순(趙榮順), 어머니는 김시눌(金時訥)의 딸이다. 1751년(영조 27)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조정철(趙貞喆)은 1775년(영조 51)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매년 중원 문화와 관련하여 열리는 학술 행사. 중원 문화라는 말은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권 지역에 형성되었던 역사·문화·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보통 중원이라 하면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과거 통일신라시대부터 나라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중원경, 중원소경 등의 지명으로 사용됐...
-
진흥왕은 재위 12년째를 맞은 551년에 나라를 새롭게 열겠다는 의지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친다. 개국의 의지를 실천하여 신라의 중흥을 이룩한 진흥왕의 일대 사업은 국경 지대의 요충인 낭성(娘城) 순수에서 우륵의 신가(하림조)를 접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진흥왕과 우륵(于勒)의 만남에는 어떠한 수수께끼가 있음이 분명하다. 다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
-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법·행정·군사적 권한을 지닌 종2품 관직. 조선 초기에는 일반 행정과 군정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태종 이후 감사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하였다. 또한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의 직책까지도 겸하게 됨으로써 그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도의 행정, 사법, 군사의 전반을 통괄하고 관할구역 내의 여러 수령을 감독하는 방대한 권한을...
-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충청도관찰사가 업무를 집행하던 관청. 충청북도 충주시에 두었던 충청감영에는 중앙의 6조를 그대로 옮긴 6방(이·호·예·병·형·공)을 설치하여 향리를 통해 감사가 도(道)의 사무를 집행하였다. 조선은 점차 국가의 기틀이 잡혀감에 따라 지방행정조직을 고려의 5도 양계에서 발전된 8도로 정비하였다. 조선의 8도는 경기·충청·전라·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