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산성
-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시 역사. 충주란 고을 이름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고 주·부·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중원부(中原府)를 고쳐 부르면서 나타났다. 충주란 명칭은 이 지역 인사들이 태봉시대부터 태조 왕건의 우익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풍광(風光)·풍속(風俗)·사적(史蹟) 등을 유람하는 일. 전국 5대 관광권의 하나인 충청관광권역에 속하는 충주호권은 행정구역상 충청북도의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 음성군, 진천군, 괴산군 등에 해당되는 지역인데 해안을 끼지 않는 내륙 지역으로서 산악, 수변, 온천 등의 자연 자원과 역사·문화 자원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충주호 관광권의 월악산...
-
1253년(고종 40) 9월 충청북도 충주시 금당협에서 고려군이 몽고군을 격파한 전투. 금당협 전투는 1253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 금당협 지역에 침입한 몽고군을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매복하였다가 격퇴한 전투로, 충주산성 전투의 서전이라 할 수 있다. 금당협의 위치는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촌상우차랑(村上友次郞)이 1015년에 쓴 『최근지충주(最近...
-
고려 후기 충주산성 방호별감을 역임한 무신이자 승려. 김윤후(金允侯)는 1232년(고종 19) 현 경기도 용인 근처에 있었던 백현원(白峴院)의 승려로 있을 때 몽골병이 침입해 오자 처인성(處仁城)[현 용인]으로 피란하였다. 때마침 몽골군이 처인성을 포위 공격해 오자 처인성의 피란민들을 지휘하여 몽골군과 싸웠으며, 몽골 원수 살리타[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여 몽골군을 퇴각...
-
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목벌동·직동에 걸쳐 있는 산. 예전에 여기서 봉황이 살았다 하여 금봉산(錦鳳山)이라고도 불린다. 해발고도 636m의 산이다. 소백산지 서쪽의 한 지맥으로서, 계명산-남산-대림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방향의 산줄기 일부에 속한다. 이 산줄기는 동~서 구조선들에 의해 군데군데 잘려나가면서 여러 개의 고개나 골짜기를 만들고 있는데, 충주댐이 있는 남한강,...
-
1256년(고종 43) 4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에서 충주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문화 예술 단체. 충주시의 문화 예술을 이끄는 대표적인 문화 예술 단체로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주지부와 구성 협회인 8개 협회, 충주문화원, 예성문화연구회, 김생연구회 등을 들 수 있다. 중원문화권의 자랑스런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충주의 향토 예술 문화를 창달하며 예술 문화인 상호간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국예술문화단체총...
-
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행정구역. 살미면(乷味面)의 옛 이름은 사을미면(沙乙未面)이다. 사을미란 모래가 많은 물가라는 뜻으로, 마을이 남한강변에 있기 때문에 자연히 모래가 많이 쌓이게 되어 붙은 이름으로 여겨진다. 한편 바뀐 명칭인 살미의 ‘살(乷)’은 물결이 빠르다는 뜻으로, 살미면 지역이 계곡이 좁고 물살이 빨라 붙여진 이름이다. 또 ‘미(味)’는 이두에...
-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지리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충주시 용탄동과 조동리 등의 유적과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를 시사해주고 있다. 이들 유적과 유물은 선사 문화의 시원과 이동, 전파 및 취락의 형태를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선사 유적이 형성된 배경은 어업에 편리...
-
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예성(蘂城)과 대원(大原)이 등장한다. 그 중 예성은 대몽항쟁의 공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별호인데,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불렸다. 현재까지도 충주의 학교·단체 등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예성에 “1255년(고종 42)에 다인철소(多仁鐵...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는 문화 단체. 중원문화권역에 대한 향토 문화의 발굴·조사 연구를 통하여 중원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78년 9월 5일 예성동호회로 발족하였다. 1996년 1월 10일 예성문화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 11월 25일 사단법인 등록을 하였다. 예성문화연구회는 문화재 발견 및...
-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동에 있는 고려시대 고묘 유적. 요갓골 고묘군은 금봉산[일명 남산, 636m]에 위치한 충주산성(일명 남산성, 할미성)의 동남쪽 일대로, 비교적 경사가 급하며 주변 지역이 과수원으로 이용되는 곳이다. 주변에 활석 광산도 운영되고 있다. 충주시에서 충주댐 방향으로 마즈막재를 넘어 바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목벌동이 나온다....
-
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 아파트 신축부지에서 발굴 조사된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고묘 유적. 충주 용산동 유적은 용산동 남동쪽의 금봉산(남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125~150m 내외의 완만한 구릉과 작은 골짜기가 남동-북서 방향으로 발달해 있는 곳이다. 주변에 충주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 직동, 요갓골, 호암동, 단월동 고분군 등 크고 작은 고분군과 유물...
-
충청북도 충주시 종민동 계명산 중턱에 있는 절터. 종민동 하종마을에서 계명산 산길을 따라가다 해발 고도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절터로, 오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기본적인 변천 사항을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 옮겼다는 구전(口傳)이 전해지고 있다. 충주시 교현동에 소재한 대원고등학교...
-
1984년 김현길이 충주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대해 쓴 향토지. 『중원의 역사와 문화유적』은 자라나는 향토의 젊은이들에게 향토의 역사를 올바로 일깨워 주고 향토에 대한 긍지를 심어 주고자 저자가 직접 답사한 내용과 경험을 정리하여 1984년 9월 청지사를 통하여 발간하였다. 1권 1책으로, 가로 12.5㎝, 세로 21㎝ 크기의 소책자 형태이며, 면수는 약 200면이다. 한...
-
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법정동. 마을이 곧은 골짜기로 되어 있어 곧은골 또는 직곡이라 하였는 데, 1914년 구운리(九雲里)와 발티[發峙]를 병합하여 직동이라 하였다. 1760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으로 동명이 나타나며, 당시에는 충원현의 남변면에 속했다. 1895년 충주군 설치로 충주군 남변면에 속하였고, 1912년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충주군...
-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동과 안림동의 경계인 남산 정상부에 축조된 고대 산성. 충주 남산성은 해발 636m의 남산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두 개의 계곡 상단을 에워싼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석축 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동악성(桐岳城)’으로 추정된다.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충주 남산성은 동악성(桐...
-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 충주 대림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과 살미면 향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대림산[487.5m]의 정상부를 포함하는 능선과 계곡부를 가로지르며 축조된 둘레 4,906m의 토석혼축 포곡식 산성으로, 고려 1253년(고종 40) 몽고의 침략에서 최대의 승전을 거둔 충주 남산성 전투의 현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당시...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미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산성. 장미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가흥리·하구암리 일대에 솟아 있는 해발 337.5m의 장미산(薔薇山·長尾山) 정상부와 계곡을 포함하여 축조된 둘레 2,940m의 삼국시대의 대규모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충주산성은 삼국시대 석성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아직까지 구...
-
고려의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전개되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1231년(고종 18) 조공 거절 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을 필두로 1254년까지 8차에 걸쳐 한반도 전...
-
충주 지역은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고대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 철광석을 캐고, 쇠를 뽑고 녹이고 두드려 각종 무기나 농구 등의 연모를 만들던 쇠부리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고대 국가의 힘의 상징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공히 충주 지역에 공을 들였으며 충주 지역을 확보한 국가가 항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충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였...
-
1253년(고종 40) 10월부터 12월까지 충주산성에서 충주민이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 몽고는 그 동안 고려를 네 차례나 침략했지만 고려 왕실의 환도를 실현시켜 실질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데 실패하자, 1253년 7월 야굴(也窟)을 대장으로 제5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1253년 7월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 수십만은 고려 동부와 서부 지역을 유린한 뒤 남하하여 양광도...
-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에서 충주산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충주산성과 오뉘힘내기 전설」는 충주시 직동과 살미면 경계에 있는 충주산성의 축성 과정에서 남매가 힘을 겨룬다는 축성전설로 비극적 장수설화의 하나이다. 충주산성은 옛날 남매 장수가 태어나 생사를 건 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누이가 쌓은 성이라 전한다. 한편 이 성을 마고할미가 쌓았다고 하여 ‘마...
-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서 충주산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충주산성을 쌓은 마고할미」는 충주시 직동의 충주산성(마고성 또는 남산성)의 축성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마고할미가 천제의 명을 받아 성을 쌓았는데 수구를 서쪽으로 내어 천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이곳에서 성지기 노릇을 하다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충주산성을 쌓은 마고할미」에는 충주산...
-
1231년 12월 충주성에서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한 충주민이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 몽고의 지나친 조공 요구로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깨어지자 몽고는 저고여(箸古與) 살해 사건을 핑계로 1231년 8월 고려를 침입하였다. 1231년 8월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을 함락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거쳐 12월 초...
-
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 충주시는 중부 내륙 광역권의 거점 도시로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풍부한 용수로 기업하기 좋은 산업 기반이 구축된 도시이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전국 교통망의 중심이며,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이자, 충주호와 월악산, 수안보온천·앙성온천·문강온천이 있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이다. 충주시를 상징하는 꽃...
-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예전에 마을 안에 죽정사(竹精寺)라는 큰 절이 있었고, 절에 석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탑대에 속해 있는 곧은골은 본래 충주군 남변면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곧은 골짜기로 되어 있으므로 곧은골 또는 직곡(直谷)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직곡·구운리·발티·탑대 등이 통합되어 충주군 읍내면...
-
1291년(충렬왕 17) 충주산성에서 고려군이 원의 반란 세력인 합단(哈丹)의 군대를 격퇴한 전투. 1287년(충렬왕 13) 4월 원(元)에서 흥안령(興安嶺) 동쪽을 지배하던 내안(乃顔)이 사심을 품고 동방의 여러 왕들을 충동질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 세조(世祖)의 친정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1288년 초에 내안의 잔여세력인 합단이 막북(漠北)에서 다시 반기를 들었는데, 원이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