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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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原城 |
영어의미역 | Gukwo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미을성,탁장성,완장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집필자 | 이창훈 |
성격 | 고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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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문헌 | 『삼국사기』|『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 |
[정의]
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지명.
[개설]
국원성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확보한 거점 지역인 오늘날 충주 지역에 성을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지역은 신라가 차지한 후 진흥왕 대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경덕왕 대에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태조에 의해 충주라는 명칭으로 변경된 후 지금까지 그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명칭유래]
국원성은 미을성(未乙省)·탁장성(託長城)·완장성(莞長城)[또는 薍長城] 등으로 불렸다고 전하는데, 그 중 미을성은 주요 기록에 모두 나타나고 있다. 나머지 명칭인 탁장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완장성(莞長城)은 『고려사(高麗史)』에, 완장성(薍長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완장성’이란 명칭은 음이 같으나 한자를 달리하여 전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국원성은 신라에 병합된 후 국원소경으로 재편되었다가 이후 중원경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형성 및 변천]
고구려 국원성의 설치 시기를 보면, 일단 하한선은 『삼국사기』에서 557년(진흥왕 18)에 국원소경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그 시점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상한선을 추정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고구려의 충주 지역 진출 시기에 대한 확인이다. 고구려의 남진에 의한 백제 한성의 함락과 개로왕의 전사(475), 충주 고구려비의 존재를 통해 대략 5세기 말에는 충주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 광개토왕비에서 나타나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의 군사적 활동 등을 근거로 그 시기를 보다 소급해 보려는 연구들이 제시되어, 근래에는 대략 5세기 초부터 충주 지역은 고구려에 의해 장악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다. 따라서 국원성은 5세기 초에서 6세기 중엽까지 약 150여 년간 고구려에 의해 설치·존속되었고, 이후 신라에 의해 이 지역이 장악되어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고구려 국원성의 위치가 충주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의 구체적인 위치, 즉 치소(治所)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으며, 이후 신라에 의해 재편된 국원소경이나 중원경과 동일한 곳인지의 여부도 아직은 불명확한 형편이다.
치소에 관한 견해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충주 고구려비에 나타나는 우벌성(于伐城)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에 있는 장미산성으로 보아 이를 국원성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나는 국원소경의 성 둘레(2,592보)를 현재의 미터법으로 환산하여 규모를 추정하고, 그에 적합한 입지를 고려하여 현재의 충주 시내 쪽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끝으로 충주 일대의 유적과 유물의 분포를 통해 중앙탑이 있는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관련기록]
국원성과 관련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체로 비슷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에서는 557년에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의 국원성 지역을 국원소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곳은 『삼국사기』권35 「잡지」4 한주 중원경에 따르면, 신라 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이며 고려시대의 충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고려사』권56의 충주목에서도 충주목(忠州牧)과 관련한 기록의 연혁에서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권14 충청도 충주목에서도 같은 내용에 고려와 조선의 연혁을 추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