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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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惠嬪楊氏 |
영어의미역 | Hebin Yang Clan, Royal Concubine |
이칭/별칭 | 민정(愍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현정 |
[정의]
조선 전기 세종의 후궁.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현감 양경(楊景)의 딸이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 등 3남을 낳았다.
[활동사항]
세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1441년(세종 23) 현덕왕후(顯德王后)가 동궁인 노산군[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자 세종은 혜빈 양씨를 택하여 어린 동궁을 보살피게 하였다. 이에 혜빈 양씨는 정성을 다해 단종을 보살폈고 이러한 지극 정성은 단종의 성덕(聖德)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455년(단종 3) 혜빈 양씨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옥쇄를 거두려고 하자 “옥쇄는 국왕의 중보(重寶)이다. 선왕의 유훈(遺訓)에 ‘세자와 세손이 아니고는 전할 바가 아니라’ 했기에 비록 내가 죽더라도 내놓지 못하리라”고 훈유(訓喩)하여 말하다가 그날로 죽음을 당했다.
혜빈 양씨의 3남인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도 운검(雲劒)을 갖고 입시하다 동시에 죽음을 당했다. 1남인 한남군(漢南君) 이어(李王於)는 경상남도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 3) 금성군(錦城君)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화를 입고 적소에서 병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713년(숙종 39)에 혜빈 양씨의 묘를 봉하려 했으나 묘 자리를 잃어버려 정하지 못하고 부조묘(不祧廟)를 명하였으며, 1791년(정조 15)에 민정(愍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충청북도 충주시 용관동에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