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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949
한자 宋時烈
영어음역 Song Siyeol
이칭/별칭 영보(英甫),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문정(文正),성뢰(聖賚)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헌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학자
출신지 충청북도 옥천군
성별
생년 1607년(선조 40)연표보기
몰년 1689년(숙종 15)연표보기
본관 은진
대표관직 우의정|좌의정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증조할아버지는 봉사(奉事)를 지낸 송구수(宋龜壽)이고, 할아버지는 도사(都事)를 지낸 송응기(宋應期)이다.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낸 송갑조(宋甲祚), 어머니 선산곽씨(善山郭氏)는 봉사를 지낸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활동사항]

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등의 벼슬을 지냈다.

효종에 의해 북벌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지만, 김자점 일파가 청에 밀고함으로써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후 충주목사·동부승지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김자점의 몰락 후 다시 집의·이조판서 등의 벼슬을 맡아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왔으나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남인과 복상(服喪) 문제를 매개로 두 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제2차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득세한 후 덕원·웅천·거제·청풍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고,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1684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1683년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던 중, 1689년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주장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학문과 사상]

송시열은 주자학의 대가로서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철학사상에서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두어 정직의 실천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 이황(李滉)의 이원론적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송시열은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이 정직으로써 길러진 기상에 있다고 보았고, 정직을 수양을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스스로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으며 제자와 후손에게도 강조하였다.

송시열은 특히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해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겪기도 하였다. 성격이 독선적이고 강직하여 교우 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그것이 붕당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의 절정기에 서인 노론의 사상적 지주였으며, 문하에 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기호학파를 이끌어 갔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다.

문집으로는 1717년 숙종의 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 『우암집(尤庵集)』 167권이 있다. 1787년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215권 102책으로 『송자대전(宋子大全)』을 출간하였다. 그 뒤 후손들에 의해 『송서습유(宋書拾遺)』 9권, 『속습유(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이들을 합본하여 7책의 영인본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하였고, 1981년부터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순차적으로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묘소]

묘소는 원래 경기도 수원에 있었으나, 영조 대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번지로 이장하였다. 현재 충청북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같은 해에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을 비롯하여 수원·정읍 등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던 화양서원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약 70여 개 소에 이르는 서원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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