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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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伏龍 |
영어음역 | U Bokryong |
이칭/별칭 | 현길(見吉),구암(懼庵),동계(東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조선 중기 충주목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현길(見吉), 호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 증조부는 현령 우효친(禹孝親)이고, 조부는 증좌승지 우순좌(禹舜佐)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우숭선(禹崇善)이고, 어머니는 경주군수 이수지(李洙之)의 딸이다.
[활동사항]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당시 성균관 예식에 참석하는 당상관에게 유생들이 정배(庭拜)하는 관례를 읍례(揖禮)로 시정토록 건의하여 사림의 권위를 높였다. 1577년(선조 10) 추천을 받아 문소전 참봉이 되었다. 1582년 이이가 우복룡의 품행과 학행을 높이 평가하고 천거하면서 정구(鄭毬)의 전례에 따라 6품직에 승진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종7품직인 내섬시직장에 서용되고 이어 김포현령이 되었다.
1586년 지평으로 발탁되었으나 모친의 병을 이유로 사양하여 계속 김포현령으로 있었다. 1592년 용궁현감 재임 당시 일어난 임진왜란 초기에 대부분의 수령들이 관할 지역을 떠나 흩어졌으나 우복룡은 홀로 떠나지 않고 군사 1천 명을 모집하여 적에 응하다 패하여 흩어졌다.
그러나 다시 수백 명을 모아 밤에 예천(醴泉)의 소둔(小屯)을 습격하여 많은 적을 베거나 사로 잡았다. 고을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한 공로로 선조는 우복룡에게 특별히 가자(加資)를 내렸으며 그해 8월에 우복룡은 좌의정 윤두수의 추천으로 안동부사로 승진하였다.
1596년(선조 29) 우의정 겸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도체찰사 이원익이 우복룡이 무장이 아니기는 하나 남방의 병마가 있는 곳에서 수령을 시키면 필시 물러나지 않고 한 지역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건의하였고, 선조가 “병사를 거느리는 일을 그가 잘 하는가?”라고 묻자 이원익이 “몸으로 직접 행동하니 물러나 달아나는 장수보다는 낫습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우복룡은 강화부사로 임명되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권세가의 횡포를 금단하였으나 이들의 미움을 받아 1599년 홍주목사로 전임되었다.
1600년(선조 33) 체찰사 이항복의 천거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1602년 8월 2일에는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나주목사 재임 시에도 선치하여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속감)를 하사받았다. 이어 1606년(선조 39)에 충주목사로 전임되었고 1612년( 광해군 4)에는 성천부사로 있었으나 용궁현감으로 있을 당시인 임진왜란 때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구암집(懼庵集)』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 18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