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리 유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651
한자 道東里 遺蹟
영어공식명칭 The Ancient Site at Dodong-ri, Dals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455-3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0년 8월 11일~2010년 12월 27일 - 도동리 유적 삼한 문화재 연구원이 발굴 조사
현 소재지 도동리 유적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455-3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삼한 문화재 연구원 -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서로 67[이곡동 1196-9]
성격 유적
면적 2,341㎡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던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유적.

[위치 및 현황]

구마 고속 국도 현풍 IC에서 달성 도동 서원(達城道東書院)으로 통하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달성군 구지면 도동2리 절골 마을이 나타나는데, 도동리 유적(道東里遺蹟)은 절골 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서쪽의 낙동강과는 약 250m 정도 떨어져 있다. 유적은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Ⅰ구역은 진동산[283.8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경작지 일원이며, Ⅱ구역은 남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으로 진동산과 석문산[242m] 사이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경작지 일원이다. 지형은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갈수로 낮아지는 동고서저형이며, 해발 10~19m 선상에 해당한다. 낙동강 자연 제방의 해발은 11~17m로 낙동강 하안과 표고가 비슷하므로 유적 일대는 홍수 시의 범람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도동리 유적은 4대강 살리기 일환으로 실시된 달성 도동 지구 외 4지구[달성군 현풍읍 성하리, 논공읍 상리·하리, 옥포읍 본리리, 하빈면 동곡리] 일원의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으로 인해 삼한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도동 지구를 포함한 4개 지구에 대한 지표 조사[347만 2000㎡]는 2010년 2월 26일부터 같은 해 4월 6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도동 지구는 '도동리 유물 산포지'의 동쪽 가장자리에 해당하며,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토기편과 자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사업 예정 부지 4만 ㎡ 중 도동리 유물 산포지에 포함되는 3만 3748㎡에 대해서 매장 문화재 분포 확인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해 4월 15일부터 동년 7월 9일까지 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건물 터·석축 등과 기와편·자기편 등이 확인되었고, 확인된 범위[1,941㎡]에 대해서 같은 해 8월 11일부터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후 Ⅰ구역에서 조사된 고려 시대의 수혈 유구와 구상 유구 등이 동쪽 경계부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어 400㎡를 추가[총 2,341㎡]로 조사하여 그해 12월 27일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조사 결과 고려 시대의 고상식 건물 터 1동과 수혈 9기·구상 유구 4기·주혈 8개·자연구 8기, 조선 시대의 건물 터 3동과 배수로 2기·석축 2기·석렬 1기·구상 유구 1기 등 총 31기[주혈 8개]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수키와와 암키와, 토수기와,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총 40점이다. Ⅰ구역에서는 경지 조성 과정에서 훼손된 지역을 제외한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높은 지역에는 고상식 건물과 수혈이 분포하며, 평탄면을 이루는 낮은 지역에서는 수혈과 자연구 등의 고려 시대 유구가 분포한다. Ⅱ구역은 구릉의 말단부로 경지 정리가 이루어져 평탄면을 이루고 있는데, 건물 터는 북쪽과 남쪽에 분포하며, 그 사이에 석축과 석렬·배수로 등의 조선 시대 유구가 분포하고 있다. 유구는 대부분 후대 경작지 조성 과정에서 수혈·구상 유구 등은 대부분 유실되어 벽면 일부와 바닥 면만 확인되며, 건물 터의 경우 상부 구조물은 유실되고 석축·기단 석렬 등의 하부 구조만 조사되었다. Ⅰ구역의 수혈은 평면 형태가 부정형이며, 대부분 유실되어 바닥 면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내부에는 중앙 또는 서쪽으로 치우쳐 소결흔과 목탄이 일부 확인된다. 유물은 대부분 편으로 출토되었으며, 항아리·청자 접시·청자 잔·상감 청자 접시 등의 생활 용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유구의 조성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되며 15세기 전반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Ⅱ구역 3호 건물 터는 상부 구조물은 유실된 상태지만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석축이 20m가량 확인된다. 석축의 전면으로 낙수받이와 배수 시설 등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배후와 주변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북쪽에 분포하는 2호·3호 건물 터는 부속 건물로 판단된다. 유물은 대부분 편으로 출토되었으며, 항아리·청자 잔·상감 청자 접시·분청자 발·분청자 접시·백자 발·백자 접시 등의 생활 용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출토 유물로 볼 때 유구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에 해당된다. 유적은 고려 시대~조선 시대 건물 터와 관련된 기단 석렬과 청자 접시·상감 청자 접시 등을 볼 때 기와 건물 터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촌락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낙동강을 면하고 있어 나루터를 갖춘 교역촌일 가능성도 있다.

[의의와 평가]

도동리 유적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조성된 생활 유적으로 낙동강 변을 따라 형성된 인간의 주거 생활과 생산 활동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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