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1011
한자 多斯邑 鋤齋里 都村 星州都氏 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도촌 마을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성격 집성촌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있는 성주 도씨 집성촌.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도촌 마을은 성주도씨(星州都氏) 대종파(大宗派) 집성촌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구광역시의 배후 도시로 아파트와 상가가 밀고 들어와 아파트촌으로 변모한 가운데, 도씨들의 집성촌이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성주도씨는 고려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할 당시 명망이 높은 지방 호족이었던 도진(都陳)을 건국 공신으로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일명 성산부원군]에 봉하였기 때문에 관향을 팔거로 하였고 고려고종(高宗) 때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을 시조로 삼는다. 그 후 팔거현[현 경상북도 칠곡군]의 토성으로 여러 대를 세거(世居)하다가 1540년(중종 35)경에 성주도씨 16세인 경상 좌도 병마우후(兵馬虞侯) 도흠조(都欽祖)가 와룡산 기슭인 당시 하빈현 도촌리에 이거하였다. 입향조 도흠조는 조선 1515년(중종 10)에 출생하여 1563년(명종 18)에 세상을 떠났다.

[형성 및 변천]

성주도씨가 서재리에 입향한 이래 문과·무과 급제의 교지가 24매로, 관직에 진출하고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을 남겼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도성유(都聖兪)와 도여유(都汝兪), 도신수(都愼修)가 있다. 도성유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으로부터 사사 받은 학자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도여유는 한강과 낙재의 문하에서 사사 받았다. 달성 십현으로 추앙을 받았고, 이괄(李适)의 난에 창의를 도모하며 무공랑(務工郞)에 올랐다. 저서로 『서재집』 4권 2책이 있다. 아들 사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감으로써 향촌 사회에서 추종하였으며 이에 도여유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을 서재로 부르게 된 것이다.

도신수서재의 아들이다.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으로부터 사사 받은 뒤 29세에 대과에 급제 형조·호조 좌랑, 충청도 도사에 이어 강진 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부모를 모셔야 한다며 사직하였다. 그 후 함흥 판관이 되어서, 한 아전이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제 집에 숨겨 종으로 삼고 그 어미와 오라비를 죽인 사실을 은폐해 여러 해 동안 미결로 남아 있던 사건을, 도신수가 부임하여 진상을 밝히자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어 울산 부사를 거쳐 영해 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병을 얻어 5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현황]

마을에는 용호 서원(龍湖書院)과 치경당(致敬堂) 및 정렬각(旌烈閣)이 있다. 용호 서원은 성주도씨의 현조인 도성유도여유, 도신수를 배향하고 있다. 1708년(숙종 34)에 창건하였다가 고종 때 훼철되어 용호 서당으로 부르다가 다시 서원으로 복원하였다. 치경당은 성주도씨 선조인 도순과 도유도, 도유덕의 향사를 모시기 위해 1970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향사는 매년 4월 5일에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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