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헌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1499
한자 撝軒集
이칭/별칭 『휘헌 문집(撝軒文集)』,『휘헌 선생 문집(撝軒先生文集)』,『위헌 문집(撝軒文集)』,『위헌 문집(僞軒文集)』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보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휘헌집』 간행
소장처 성균관 대학교 도서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명륜 3가 53]
소장처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신촌동 134]
성격 고도서|시문집
저자 도신여
간행자 도석기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8.6㎝[세로]|19.7㎝[가로]
어미 내향 이엽 화문 어미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인 도신여의 시문집.

[저자]

도신여(都愼與)[1605~1675]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휘헌(撝軒)이다. 대구 하빈현 도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도여유(都汝兪)이며, 어머니는 여흥 이씨(驪興李氏) 이우겸(李友謙)의 딸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도성유(都聖兪)의 양자가 되었다. 정구(鄭逑), 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했고, 1651년(효종 2)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했다. 1656년(효종 7) 용담 현령으로 부임하여 봉급 일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59(효종 10) 예조 정랑으로서 자의 대비[장렬 왕후 조씨] 기년복(朞年服)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사직했다. 이듬해 다시 예조 정랑에 임명되어 명경과(明經科)를 공정하게 주관하여 선비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 기년설을 반대한 소를 올려 황간(黃澗)으로 유배되었다가 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휘헌집(撝軒集)』이 있다.

[편찬/간행 경위]

1868년(고종 5) 도신여의 6세손 도석기(都碩基)가 편집하여 1868년 『휘헌집』을 간행하였다. 1799년에 쓴 박명섭(朴命燮)의 서문과 1868년에 쓴 도석기, 정지순(鄭之純)의 발문이 있다. 『휘헌 문집(撝軒文集)』, 『휘헌 선생 문집(撝軒先生文集)』, 『위헌 문집(撝軒文集)』, 『위헌 문집(僞軒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목판본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계선(界線)이 있으며,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28.6㎝, 가로 19.7㎝이며, 반곽은 세로 19.4㎝, 가로 15.4㎝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로 되어 있다. 성균관 대학교 도서관과 연세 대학교 학술 정보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에는 시(詩) 25수, 부(賦) 2수, 소(疏) 1편, 서(書) 4편, 잡저(雜著) 6편, 제문(祭文) 2편, 묘지(墓誌) 4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2에는 부록으로 제현신장(諸賢贐章), 제현서독(諸賢書牘), 만(挽), 제문(祭文),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墓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의 「의례소(議禮疏)」는 1660년(현종 1) 자의 대비의 상복 문제를 논한 것으로, 송시열(宋時烈) 등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을 반대하고 『예경(禮經)』에 근거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서(書)도 당시 예송(禮訟)에 관하여 허목(許穆), 조경(趙絅), 윤휴(尹鑴) 등에게 보낸 것들로 참고 자료가 된다.

잡저 중 「문임관(問任官)」은 임금이 현능한 사람을 등용할 것을 주장한 글이다. 서(序) 중 「금호선유록후서(琴湖船遊錄後序)」는 1601년(선조 34) 서사원, 장현광(張顯光), 여대로(呂大老), 김극명(金克銘) 등이 금호에서 선유한 기록의 서문이고, 「용담향약서(龍潭鄕約序)」는 1656년 용담 현령으로 부임하여 향약을 창설하고 이에 쓴 서문이다. 제문은 1657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배시량(裵時亮)에 대한 것이 있다.

[의의와 평가]

『휘헌집』을 통하여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를 논하면서 송시열의 기년설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한 「의례소」와 허목 등 중앙의 주요 남인 정객들과 나눈 예송에 관한 편지들이 있어 정구의 문인이었던 도신여의 예설과 예송 과정에서 중앙과 영남의 남인 학자들 간의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면모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외에 향약과 영남 지역 학자들의 동향을 보여 주는 글들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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