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08
한자 道路- 交通手段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재두

[정의]

대구 지역에서 조선시대에 사람이나 탈것 등이 다니도록 땅 위에 만들어 놓은 도로와 짐을 옮기는 데 쓰이는 교통수단.

[내용]

조선시대는 서울[한양, 한성]이 나라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전국의 도로망은 서울을 중심으로 9개의 간선도로를 설정하였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뻗은 도로는 그 멀고 가까움에 따라 등급을 대로·중로·소로로 나누었다. 영남로의 경우 죽산 분행역(分行驛)[후기에는 광주 낙생역]까지를 대로, 분행역에서 상주 낙양역(洛陽驛)까지를 중로, 낙양역 이하는 소로라 하였다.

거리는 주척(周尺) 6척[약 182㎝]을 1보, 360보를 1리[약 0.393㎞], 30리를 1식(息)이라 하였다. 그리고 10리마다 소후(小堠)[작은 이정표], 30리마다 대후(大堠)[큰 이정표]를 세우고, 거리와 지명을 표시하였다. 또 5리마다 정자를 세워 ‘오리정(五里亭)’이라 하고, 30리마다 버드나무 등을 심어 여행자가 쉬게 하였다. 당시 문경새재의 길 폭은 1~2보에 불과하였고 경사가 급하여 수레의 통행이 힘들었으며 사람이 간신히 다닐 정도였다.

대구부는 9개 간선도로 중 부산[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흔히 영남대로라고 하는 제4로에 속하였다. 서울에서 대구를 지나는 도로망은 칠곡 우암창을 지나 금호강을 건너 대구에 이르렀고, 가창의 오동원[오원]을 경유하여 팔조령을 넘어 부산으로 향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에 의하면, 서울까지는 670리 7일이 걸렸으며, 남쪽으로 통영(統營)까지 330리 사흘 반, 동쪽으로 병영(兵營)까지 240리 이틀 반, 남쪽으로 수영(水營)까지는 270리 사흘 거리였다. 『대구읍지(大丘邑誌)』[1768]에는 통영 340리, 병영 270리, 수영 300리, 우병영(右兵營) 270리로 나온다.

도로의 기능을 크게 저하하는 장애물은 산악과 하천이다. 한강과 임진강은 도성의 방어를 위한 자연적인 방어선은 되었을지 모르나 교통로에 있어서는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양쪽 지점에는 나루터가 생겨났다. 나루는 규모에 따라 도(渡)와 진(津)으로 구분되었다.

1796년(정조 20)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은 부의 서쪽에 돌다리를 쌓아 달서교(達西橋)라 하였다. 나루터로는 칠곡부 경계에 금호진(琴湖津), 경산현 경계에 검정진(檢汀津), 신녕현 경계에 살내[箭灘], 성주목 경계에 신장진(新場津)이 있었는데, 봄과 여름에는 배로 건너고 가을과 겨울에는 다리를 설치하였다. 특히 서울로 통하는 금호진에는 1806년(순조 6) 관찰사 김희순(金羲淳)이 돈을 내어 작미(作米)로 삼자 칠곡부에서 매년 모미(耗米) 8석[약 180l] 6말[약 108l] 4되[약 7.2l]를 취하여 다리를 설치하는 비용으로 삼았으며, 1829년(순조 29)에 관찰사 정기선(鄭基善)이 별회모(別會耗) 가운데 18석[약 3,240l] 14말[약 25.2l] 4되[약 7.2l]를 매년 보충용으로 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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