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16
한자 儒敎[達城郡]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홍수

[정의]

달성 지역에서 공자의 사상과 관련하여 행해지는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우리나라의 유교 도입은 1289년(충렬왕 15)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1243~1306]이 충렬왕(忠烈王)[1236~1308]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朱子)의 『사서 집주(四書集注)』를 가지고 와 태학(太學)에서 본격적으로 강론하면서부터이다.

[달성군 유교의 시발]

달성군에서는 충렬왕 때 안향이 재상이 된 다음에 유교의 경전(經典)을 가르치는 교수로 기용되었던 추적(秋適)에서 시작되어 내려오고 있다. 추적은 충렬왕 초기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안동 서기(安東書記)와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정6품]에 올랐던 인물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진 추적이 달성군과 지역적 연고를 맺고 활동하였으니, 당시 달성 지역 선비들의 유교적 소양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달성군 유교의 발전]

김종직(金宗直)[1431~1492]을 대표로 하는 달성군의 유교는 상당한 수의 학자들을 계속하여 배출하였다. 그것은 달성군 지역에 김종직을 배향(配享)하는 도동 서원(道東書院)을 비롯하여 금암 서원(琴巖書院), 낙빈 서원(洛濱書院), 녹동 서원(鹿洞書院), 송담 서원(松潭書院), 용호 서원(龍虎書院), 예연 서원(禮淵書院), 이강 서원(伊江書院), 이양 서원(尼陽書院), 인흥 서원(仁興書院), 한천 서원(寒泉書院) 등의 서원들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서원들에 모셔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달성군이 배출한 유학자들 가운데 몇 사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달성군 유가읍 가태리에 있는 예연 서원에 배향된 곽준(郭逡)[1550~1597]과 곽재우(郭再祐)[1552~1617]이다. 곽준은 낙강칠현(洛江七賢)인 배신(裵紳)[1520~1573]과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면(金沔)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곽재우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으로 도학(道學), 병법(兵法), 천문(天文) 등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홍의(紅衣)를 입고 지휘하여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고 해서 홍의 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는 이양 서원에 배향된 곽안방(郭安邦)은 김종직의 문하에 입문하여 수학하였는데, 김종직이 그를 김굉필(金宏弼)[1454~1504]과 함께 수재라고 칭찬할 만큼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금향 서원에 배향된 정사철(鄭師哲)[1530~1593]은 과거에 합격하여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관군을 지원하였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 있는 용호 서원에 배향된 도성유(都聖兪)[1517~1649]는 정구와 서사원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문장과 행실이 출중하였는데, 임진왜란 때는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자호란 때는 왕이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비보를 듣자 비분강개를 금치 못하고 세상과 등지고 한평생을 보냈다.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는 이강 서원에 배향된 서사원(徐思遠)[1550~1615]은 정구의 문인으로 주자와 퇴계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달성군 유교의 전개]

달성군 지역에 유교가 한층 더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당시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라는 공직에 있던 길재(吉再)[1353~1419]의 귀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길재는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인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서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부터 길재는 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의 학설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매진하였다. 그로 인해 영남(嶺南) 지역에 사림(士林)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른바 김종직을 비롯하여 정여창(鄭汝昌)[1450~1504], 김굉필,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이 바로 이러한 인물들로서 조선 중기에 사회와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은 달성군이 배출한 학자로서 1610년에 동방오현(東方五賢) 중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달성군 유교의 현재와 미래]

달성군의 유교는 우리나라 어느 지역과 매한가지로 조선 시대에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여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어, 달성군의 주요한 문화 전통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의 명맥을 계승하려는 노력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1759년 현재의 달성군 현풍읍 상리로 이전한 현풍 향교(玄風鄕校)가 있다. 현풍 향교에서는 아직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도회(儒道會)와 유림 교육원(儒林敎育院)을 조직하여 인문학 캠프, 하계 인성 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한 유교의 보급에 힘쓰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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