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달성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974
한자 東萊鄭氏[達城郡]
영어공식명칭 Dongrae Jeongssi|Dongrae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박곡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57년 - 정상구 출생
본관 동래 - 부산광역시 동래구
입향지 용두골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문양 1리 용두골
세거|집성지 용두골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문양 1리 용두골
세거|집성지 박실 마을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 박실 마을
성씨 시조 정회문(鄭繪文)
입향 시조 정상구(鄭尙耉)

[정의]

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정상구를 입향조로 삼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세거 성씨.

[개설]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는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상구(鄭尙耉)가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입향한 이래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다사읍 문양 1리 용두골과 박곡리 박실 마을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연원]

동래정씨는 신라 6부촌의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후손이다. 고려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을 시조로 삼는다. 정회문의 경우 문헌이 실전되어 생몰 연대와 사적 및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따라서 후손들은 정회문을 시조로, 고려 때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기세조(起世祖)로 삼고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입향 경위]

『동래정씨 기미 세보(東萊鄭氏己未世譜)』에 따르면 정지원의 14세 정종(鄭種)의 3남 정예운(鄭禮耘)과 그 후손의 무덤이 대구 천곡(天谷)에 있고, 정종의 5남 정신운(鄭信耘)의 경우 무덤은 미상이나, 단(壇)이 달성(達城) 문양(汶陽)에 있다고 한다. 정신운의 아들 정억수(鄭億壽)의 무덤은 문양동에 있고, 정억수의 아들 정이문(鄭爾文)부터는 지거동(池巨洞)에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족보 상의 무덤 만으로는 정확한 입향조와 입향 경위를 알 수 없다. 『달성 마을지』와 『대구의 뿌리 달성』에서는 정이문의 아들 정상구를 문양 입향조로 삼고 있다. 정상구의 자는 대보(大甫), 호는 문상재(汶上齋)이다. 부인은 순흥 안씨(順興安氏) 안세창(安世昌)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를 도와 공을 세웠다. 무덤은 지거동에 있다. 이 밖에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세천리, 화원읍에도 동래정씨로 구성된 씨족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나 자세한 입향 경위는 알 수 없다.

[현황]

1998년 달성 마을지 편찬 위원회가 편찬하고 달성 문화원에서 간행한 『달성 마을지』에 따르면,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세거하는 동래정씨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화원읍의 경우 천내 1리 53가구, 성산 2리 8가구 총 6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다사읍의 경우 박곡리[다사읍 박곡리 박실 마을 동래정씨 집성촌] 62가구, 문양 1리[다사읍 문양 1리 용두골 동래정씨 집성촌] 42가구 총 10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하빈면의 경우 묘 1리 7가구, 묘 2리 8가구, 감문 2리 20가구, 동곡 1리 5가구, 봉촌 1리 13가구, 봉촌 2리 12가구 총 6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유가면[현 유가읍]의 경우 양 1리 4가구, 양 2리 4가구, 용봉리 15가구, 금 1리 6가구 총 2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2,91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관련 유적]

달성 지역 동래정씨의 관련 유적으로는 문양리에 소재한 문상재(汶上齋)가 있다. 이는 입향조인 정상구를 기리기 위하여 1964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이외에도 박곡리에는 학우정(鶴友亭) 정후흥(鄭后興)과 그의 아들 정시상(鄭時祥)의 재실인 학우재(鶴友齊)가 있으며, 매곡리에는 정예운의 손자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과 정사철의 아들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을 배향하는 금암 서당(琴岩書堂)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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