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체육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209
한자 嶺南體育會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성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5년 6월 17일연표보기 - 영남체육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9년 10월 17일연표보기 - 영남체육회 해체
성격 체육단체
설립자 송기찬|윤용기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체육 단체.

[설립 목적]

영남체육회대구운동협회가 발전적 해체 수순을 밟자 새로운 체육단체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낀 대구운동협회 간부 10여 명이 설립한 단체이다.

[변천]

영남체육회는 1935년 6월 17일에 송기찬, 윤용기 등 대구운동협회의 간부들이 대구운동협회가 해체되자 새로 결성한 단체이다. 1935년 10월 대구축구협회와 통합되었으며, 1939년에는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해체되어 조선체육회의 스모부[씨름부]로 남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남체육회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조선의 자주적인 체육 경기를 개최하였던 대구의 스포츠 단체였다. 시민들의 체력 증진을 위하여 매일 오전 6시부터 달성공원에서 보건체조를 실시하는가 하면,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하여 수익을 남겼을 뿐 아니라 대구의 씨름을 전국에 알리는 데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지는 사건이 『동아일보』를 통하여 발생하였을 때, 일제가 설립하지 않은 체육단체에서 경기를 개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전조선씨름대회’만큼은 개최하였다. 영남체육회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손기정 선수를 환영하기 위하여 환영대회를 계획하였지만 일경의 제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현황]

영남체육회는 1936년에 일제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뒤 영남체육회의 이름으로 경기를 연 것은 고작 3회의 씨름 대회뿐이었다. 언제 해산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남체육회를 비롯한 대구의 체육단체들은 하나로 힘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통합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있었지만 대구축구협회와 통합에 성공하였고, 영남체육회는 비로소 체육단체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영남체육회는 1939년 10월 17일에 설립된 지 5년 만에 조선체육진흥회의 한 부서로 남아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남체육회는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겪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지금의 대구광역시 체육회경상북도 체육회가 그 뜻을 이어받아 지역민들의 건강 증진과 생활체육의 저변 확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체육단체들은 오랜 기간 활동하지 못하고 설립과 해체를 반복하였지만 각 단체들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다를 것이 없었다. 영남체육회도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각성하며 대구 체육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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