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대구 민충사 중건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557
한자 大邱 愍忠祠 重建記
영어공식명칭 Records of the re-construction of Minchungsa in Daegu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명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07년 - 박규수 출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57년연표보기 - 「대구 민충사 중건기」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77년 - 박규수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11년 - 『환재집』 간행
배경 지역 민충사 -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지도보기
성격 기문|사당기
작가 박규수

[정의]

대구 지역 연구산에 있었던 민충사를 중건하면서 1857년 조선 후기 문신 박규수가 지은 기문.

[개설]

「대구 민충사 중건기(大邱愍忠祠重建記)」를 쓴 박규수(朴珪壽)[1807~1877]는 본관이 반남(潘南)이며, 자는 환경(瓛卿)이고, 호는 환재(瓛齋)이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다. 조선 후기에서 근대 개항기로 넘어가는 격변기를 온전히 겪으며 봉건주의의 실상과 한계를 몸소 체험하였다. 봉건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처지를 체험하며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실학적 학문 경향을 추구하였고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민충사(愍忠祠)는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지역의 난리를 진압한 경상도관찰사였던 황선(黃璿)[1682~1728]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의 연구산(連龜山)에 세운 사당이다. 영조 때 사원(祠院)의 사사로운 제향을 금지한다는 명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철종 때 중건하였다. 중건하면서 황선을 비롯하여 원필규(元弼揆)[1687~1771], 이무실(李茂實)을 제향하였다. 현재 민충사는 남아 있지 않다.

[구성]

「대구 민충사 중건기」민충사의 건립과 훼철 그리고 중건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 민충사 중건기」는 1854년 박규수가 영남 지역 암행어사를 마치고 돌아와 민충사의 건립과 훼철에 대하여 철종에게 주달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지역 난을 진압한 황선의 공적과 백성에게 미친 은택을 강조하며 사당 건립의 의의와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어 사당 중건의 과정과 제향 인물들에 대한 설명, 중건기를 쓴 이유과 제향 인물들의 공덕을 찬양하며 글을 마무리하였다.

[특징]

「대구 민충사 중건기」는 왕에게 주달한 내용과 영남 지역 관찰사로 파견되었던 신석우(申錫愚)[1805~1865]가 중건 과정을 기록하여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기문의 서문과 본문을 구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민충사 중건기」를 통하여 현재 전하지 않는 민충사의 역사와 중건의 과정, 제향 인물들의 공적을 확인할 수 있다. 글을 꾸미지 않고 독자에게 보여 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내용의 객관성과 사실성을 확보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