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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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京畿邑誌楊州牧邑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현욱 |
편찬 시기/일시 | 1871년 - 『경기 읍지』 「양주목 읍지」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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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871년 - 『경기 읍지』「양주목 읍지」 간행 |
성격 | 고도서|읍지 |
저자 | 각 군현 |
권책 | 6책[『경기 읍지』] |
규격 | 30×20.1㎝ |
[정의]
도봉구를 포함하는 양주목이 수록된 개항기의 경기 지역 읍지.
[개설]
「양주목 읍지(楊州牧邑誌)」는 경기도 소관 각 군현의 읍지를 묶은 통지(統誌)인 『경기 읍지(京畿邑誌)』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경기 읍지』에 수록된 다른 읍지와 마찬가지로 「양주목 읍지」 또한 말미에 당시 목사의 착성(着姓)[행목사 김(行牧使 金)]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양주목에서 읍지를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편찬/간행 경위]
읍지는 인문 지리적 현황 등의 파악을 통하여 당해 지역의 통치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한다. 「양주목 읍지」 역시 그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일부 읍지의 범례에서 그 체제를 모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한다는 것을 밝힌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기 읍지』「양주목 읍지」를 비롯하여 많은 읍지에서 각 지역 지방관의 착성이 보인다. 조선 시대 당시의 문서 행정에서 서명이 가지는 의미를 감안하면 각 지역 읍지는 경기도 관찰사 또는 상위의 관부로부터 하달된 명령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편찬 경위는 「가평 읍지(加平邑誌)」 서문에 “읍지등상지령(邑誌謄上之令)”이라고 기록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수록된 각 군현 읍지의 지질(紙質)이나 흑괘선(黑掛線)의 형태가 동일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경기 읍지』에 포함된 일부 읍지 가운데 작성 연대를 동치(同治) 10년으로 표시한 것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편찬 연대는 1871년(고종 8)인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양주목 읍지」는 총 6책으로 묶인 『경기 읍지』의 4책에 수록되어 있다. 『경기 읍지』는 필사본으로 규격은 30×20.1㎝이다.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양주목 읍지」의 구성은 도(圖)·지(誌)·사례(事例)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부 편차가 있으나 대체로 앞서 편찬된 『경기지』[奎 12178]나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체제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내용 서술에서는 앞선 시기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의 내용에서 변화가 발생한 부분을 수정·보완하고 있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내정에서 변화된 부분의 반영이 그것이다.
「양주목 읍지」의 첫 부분인 도(圖)는 『경기 읍지』 4책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도봉구의 옛 지명인 ‘해등촌(海等村)’과 이 지역에서 상업이 발전한 것으로 알려진 ‘누원점(樓院店)’이 각각 표시되어 있다. 지(誌)에서는 기왕의 지리지와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양주목의 연혁, 성씨, 산천, 제언(堤堰), 토산(土産), 봉수, 궁전, 학교, 역원(驛院), 목장, 면리, 사찰, 사묘, 능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례(事例)는 각방 사례(各房事例)로 표시되어 있는데, 군총(軍摠), 저치미(儲置米)[비상시에 대비하여 나라에서 비축하던 쌀], 관청 수요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당시 조선은 1862년 임술민란 이후 여러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것과 함께 외국 세력으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에 함께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과제에 대하여 흥선 대원군이 일련의 내정 개선 조치를 추진하였고, 『경기 읍지』는 이와 관련한 여러 정책의 시행을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되었다. 이 점은 사례 부분에서 환정(還政), 호포제(戶布制), 군제(軍制) 개편 등과 관련한 내용을 수록한 읍지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