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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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정선 |
[정의]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서울특별시 도봉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
[의병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각지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도봉 지역 출신으로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자로는 윤희섭(尹喜燮)이 있는데, 1881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농민 출신이었다. 윤희섭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창설된 연기우(延基羽)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영평군(永平郡), 포천군(抱川郡) 및 강원도 평강군(平康郡), 철원군(鐵原郡) 일대에서 활약하며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금하거나 조달하고, 친일 밀정(密偵)들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1908년에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1995년 민족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 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3·1 운동]
일제는 군사력으로 한국을 강점한 후 무단 통치를 실시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과 수탈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고양된 우리 민족은 독립을 천명하며 3·1 운동을 전개하였다.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 해당하는 당시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도 도봉리와 창동리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26일에 경기도 양주군 도봉리에서 약 400명의 군중이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나 일본 헌병에 의해서 곧 해산되었고, 3월 29일에는 창동리에서도 약 500명의 주민들이 시위운동을 일으켰으나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 이하 92명을 검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출신으로서 일본에서 일제의 강제적인 동화 정책에 저항한 독립 운동가로 김동호(金東鎬)가 있었다. 김동호는 1919년에 태어나 1937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중학교에 입학했고, 1940년에 조선인 동기생들과 함께 조선인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와 조선인에 대한 민족성 말살 정책에 반대하여 학우회 회원들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을 준비하다가, 1941년 2월 17일 경찰에 일제히 검거되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 김동호는 미결 기간을 합산하면 1943년 2월까지 3년간 옥고를 치루고 면소(免訴)되었다. 1990년 독립운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애국지사의 은둔처]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제 말기 거센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키며 민족 독립을 염원하던 애국지사들도 있었다.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의 민족성을 완전히 말살하고자 사회의 유력자 및 지도층을 친일파로 만들어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을 황국 신민화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선전에 앞장서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며 지조를 지키려던 애국지사들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를 은신처로 삼아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인 인사로는 김병로(金炳魯), 정인보(鄭寅普), 송진우(宋鎭禹), 홍명희(洪命憙), 홍기문(洪起文), 홍기무(洪起武), 박명환(朴明煥)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은거하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독립을 염원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거세어지자 창동을 떠나 아예 시골로 낙향하는 인사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