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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74
한자 李祺
이칭/별칭 강녕(江寧),문경(文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우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06년 3월 8일 - 이기 김숙화와의 갈등으로 국문당함
활동 시기/일시 1506년 7월 14일 - 이기 아버지·형과 함께 고신 박탈당함
활동 시기/일시 1506년 7월 14일 - 이기 위리안치됨
활동 시기/일시 1517년 10월 27일 - 이기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한 김정 등을 옹호
추모 시기/일시 1794년 9월 7일 - 이기 시호 받음
묘소|단소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지도보기
성격 왕족
성별
본관 전주(全州)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왕족.

[가계]

이기(李祺)는 조선 세종의 9남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의 장남인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의 차남이다. 부인은 양주 조씨(楊州趙氏)로,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다. 후처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이기연산군 대와 중종 대에 걸쳐 주로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연산군 대에 나주 기생 출신의 나인 김숙화(金淑華)가 이기의 집을 빼앗으려 하였는데, 당시 강녕 부정(江寧副正)으로 있었던 이기가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이기의 집 노비 금동(金同)[일명 금음동(今音同)]과 함께 거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김숙화가 연산군에게 무고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이기의 부모·처자·형제·장인을 모두 연좌하여 가두어 국문하도록 명하는 한편, 집을 봉하고 노비를 모두 잡아오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추관(推官)들에게 낙형(烙刑)을 쓰도록 닦달하는 한편, 이기 형제의 죄를 정하여 유배지를 정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리고 이기와 그 아버지, 형제의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았으며, 이기에게 장(杖) 100을, 그 아버지에게 장 80을 때려 유배지에 보내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이기의 가문은 복권되었다.

특히 위의 사건에서 죽는 순간까지 주인 이기를 대신하여 모두 자신의 죄라 하였던 노비 금동은 특별히 국가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지금 도봉산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 함께 안장되어 있다. 이기는 이후 중종 대에 이정숙(李正淑) 등과 함께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金淨) 등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던 사실이 확인된다. 훗날 조광조(趙光祖)가 처형된 이후 이기조광조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

이기의 묘역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번지에 자리 잡은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정조 대에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이기만이 시호를 받지 못했으니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정조가 이에 응하여 1794년(정조 18) 9월 7일에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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