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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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仁傑 |
이칭/별칭 | 사위(士偉),휴암(休庵),문경(文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전기 양주 목사를 지내고 도봉 서원의 사액을 위해 애쓴 유학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庵).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지평을 지낸 백효삼(白效參)이고, 할아버지는 백사수(白思粹)이며, 아버지는 왕자사부를 지낸 백익견(白益堅)이다. 외할아버지는 우종은(禹從殷)이다.
[활동 사항]
백인걸(白仁傑)[1497~1579]은 젊어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매우 존경하여 조광조의 집 옆에 집을 짓고 기거하면서 수학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실망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은거하기도 하였다. 1537년(중종 32) 식년시 병과에 합격하고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예문관 검열이 되어 이조(吏曹) 행정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제도를 부활시켰다. 1541년(중종 36)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1545년(인종 즉위년) 사헌부 지평·호조정랑·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였다.
명종이 등극한 이후에는 윤원형(尹元衡) 등의 대윤(大尹)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을 제거할 때, 대비가 내린 밀지의 부당함을 제기하다가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문정 왕후의 수렴청정과 당시 실세들의 정권 농단을 비판하는 벽서가 양재(良才)에 걸리는 사건을 빌미로 사림 세력과 소윤(小尹)들이 처단될 때 함경도 안변(安邊)으로 귀양을 갔다. 1565년(명종 20)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승문원 교리로 등용되었으며, 2년 뒤 양주 목사가 되었을 때에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치적을 쌓아 양주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워 주기도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사림이 대거 등용되던 분위기 속에서 백인걸 역시 대사간·대사헌·공조참판·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림의 동서 분당을 막으려던 그의 노력이 선비들을 공격한다는 오해를 받아 파주에 퇴거하는 등 예민한 정치적 문제에 자주 연루되어 낙향하는 때가 많았다. 백인걸은 이 동안에 조광조의 문묘 종사와 도봉 서원의 사액을 끊임없이 건의하였다.
1578년(선조 11) 남언경(南彦經)이 도봉 서원을 짓고 조광조를 제향하자, 병이 들어 파주에 머물던 백인걸은 조광조의 문묘 종사와 도봉 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갔지만 선조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며칠 후 선조가 우참찬에 제수하려고 백인걸을 불렀으나, 그는 자신이 상소로 청한 일을 이루기 위해 도성에 들어왔던 것이지 조정에 나아갈 생각은 없다는 뜻을 밝힌 일화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12권 11년 8월 1일 기사에 실려 있다. 또한 같은 책 백인걸의 졸기에는 그가 녹봉미와 마초 값[騶直]을 모두 도봉 서원에 보내고 왕래하거나 유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학문과 저술]
조광조·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기묘 사림의 일원으로 일컬어진다. 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사림 계열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던 만큼 그의 학문도 정주학(程朱學)을 깊이 연구하는 데에 있었다. 저서로 문집인 『휴암집(休庵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문경(文敬) 시호를 받았으며, 파주의 파산 서원(坡山書院)과 나주의 봉산 서원(蓬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