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42
한자 李珥
이칭/별칭 숙헌(叔獻),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문성(文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6년연표보기 - 이이 생
활동 시기/일시 1548년 - 이이 진사 초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584년연표보기 - 이이 졸
추모 시기/일시 1623년 - 이이 영의정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24년 - 이이 문성(文成) 시호 받음
추모 시기/일시 1682년 - 이이 문묘(文廟)에 종사
추모 시기/일시 1689년 - 이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문묘에서 출향
추모 시기/일시 1694년 - 이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문묘에 배향
부임|활동지 이이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덕수(德水)
대표 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기(道峰書院記)」를 지은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신명화(申命和)의 딸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신사임당(申師任堂)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인은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이(李珥)[1536~1584]는 13세 때인 1548년(명종 3)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명종 6) 수운판관인 아버지를 따라 해서(海西)로 갔다. 16세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른 후 19세가 되던 1554년(명종 9) 불교에 뜻을 두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그 1년 뒤인 1555년(명종 10) 강릉으로 내려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결혼을 한 후 1558년(명종 13) 예안(禮安)의 도산 서원으로 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뵈었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시를 비롯하여 문과의 복시(覆試), 전시(殿試)까지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 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거쳐서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9년(선조 2) 독서당(讀書堂)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1570년(선조 3) 4월 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이황과 편지로 성학십도(聖學十圖) 및 출처(出處)의 의(義)에 대해 논하였다.

1571년(선조 4) 청주 목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와 성혼(成渾)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1574년(선조 7)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75년(선조 8) 또다시 병으로 체직되어 율곡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 호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양주 목사 남언경(南彦經)의 주도로 도봉 서원의 설립이 추진되고 나서, 1579년(선조 12) 서원의 모습을 갖추고 낙성식을 앞둔 시점에 서원의 유생 안창(安昶)이 여러 선비의 요청을 받고 이이(李珥)에게 도봉 서원의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이이는 질병으로 인해 도봉 서원의 설립이 추진되는 시기에 가 보지는 못하였지만 도봉 서원 설립의 뜻을 생각하여 기문 짓는 것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기문에서 도봉 서원의 설립 과정을 설명하고, 도봉 서원에 배향된 조광조(趙光祖)의 학덕을 따라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학문과 저술]

1574년 재해가 일어나자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으며, 1575년 9월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하여 차자(箚子)와 함께 임금에게 올렸다. 1577년(선조 10) 아동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고, 1580년(선조 13)에는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1582년(선조 15)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으며, 같은 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쓰고, 『학교 모범(學校模範)』을 지었다. 또 1583년(선조 16) 「시무 육조(時務六條)」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 양병(十萬養兵)을 주장하였다.

[묘소]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은 뒤 파주 자운산 선영[현 경기도 파주시]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611년(광해군 3) 해주에서 문집 10권이 간행되었으며, 1623년(광해군 15)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고, 1682년(숙종 8)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잠시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용자 의견
홍*** 이이 내용중 '시무칠조책'은 '시폐칠조책(時弊七條策)'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15.02.10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