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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76
한자 許曄
이칭/별칭 태휘(太輝),초당(草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7년연표보기 - 허엽 생
활동 시기/일시 1546년 - 허엽 식년시 문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허엽 졸
부임|활동지 허엽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지도보기
묘소|단소 허엽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사당|배향지 화곡 서원 -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천(陽川)
대표 관직 부제학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 건립에 참여하였던 문신이자 유학자.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아버지는 군자감 부봉사 허한(許瀚)이며, 외할아버지는 판관을 지낸 성희(成熹)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평군(西平君) 한숙창(韓叔昌)의 딸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허성(許筬)을 낳았으며, 두 번째 부인은 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인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슬하에 허봉(許篈)·허균(許筠)·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다.

[활동 사항]

허엽(許曄)[1517~1580]은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사림의 대표이자 동인의 영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546년(명종 1) 식년시 갑과 3위로 급제한 이후 성균관·홍문관·사헌부 등의 언관직과 예조·이조·병조의 하위 실무직을 거치면서 입지를 다졌다. 1562년(명종 17)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동부승지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주장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삼척 부사로 발령받았으나, 이양(李樑)이 그의 과격한 언사를 문제 삼아 부임 3개월 만에 파직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는 도승지가 되어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에게 죄를 주도록 계청하는 한편, 이황(李滉)을 극진한 예로써 초빙하기를 건의하여 사림의 명망을 얻었다.

도봉 서원허엽과의 인연은 1569년(선조 2) 그가 부제학으로 재직할 때 시작되었다. 평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사모하여 그의 신원을 누차 건의하며 사림의 정체성을 조정 내에 확립하려 노력한 허엽은, 1573년(선조 6) 남언경(南彦經)조광조를 추모할 목적으로 도봉산 영국사 터도봉 서원을 건립하자 이에 소요되는 물력 대부분을 지원하였다. 또한 서원이 건립되자 원규와 운영 방침의 골격을 마련하였다.

이이가 쓴 『율곡전서(栗谷全書)』 30권에 있는 「도봉 서원기」에는 “서원의 학규(學規)와 학령(學令)은 여러 학생이 서로 부제학인 허엽 공에게 여쭈어 정했다.”고 전한다. 도봉 서원 건립 당시 허엽이 이곳에 끼쳤던 영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학규와 학령은 서원에 별도로 보관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소실과 중수·훼철 과정에서 산실되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허엽과 관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허엽은 이후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병으로 상주(尙州)의 공관에서 객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며 노수성(盧守成)이 친구이다. 학문적으로는 이이이황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저서로 문집인 『초당집(草堂集)』과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의 양천 허씨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 화곡 서원(花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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