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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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음역 | Yeoksa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집필자 | 주명준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군의 역사.
[개설]
고창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6, 잡지 제5 무량군편에서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을 신라 경덕왕 때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쳐 불렀다.”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고창군은 신라 때에 고창현으로 무령군이 관할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창현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 고창군으로 바뀌었으며, 1896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흥덕면·고창읍·무장면이 전라남도로 이관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다시 전라북도에 편입되어 고창군의 모태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과정은 지역 내외의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 오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다.
[선사 시대]
고창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2009년 고수면 증산 유적에서 처음으로 중기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성남리 유적의 주변에서는 격지편이 수습된 바 있다. 타 지역에 비해 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적게 발견되고 있다. 고창에서 신석기 유적은 아직 발견된 예가 없지만, 인접한 부안의 해안가 조개더미에서는 빗살 무늬 토기가 상당수 출토되고 있다. 또한 고창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신석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민무늬 토기의 유행과 함께 방직 기술, 제염의 일반화 등 생업의 변화도 이루어졌다. 생활 유적인 주거지는 송국리형 주거지가 주류를 이루며 예지리, 우평리, 산정리, 죽림리, 성남리, 삼인리, 남산리, 교운리 유적 등에서 주거 유적이 조사되었다. 묘제는 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 고인돌[지석묘]이 축조되었다. 특히 고창에는 죽림리, 상갑리, 운곡리, 상금리, 계산리, 삼인리, 암치리 고인돌군 등 205개 군집 지역에 1,665기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죽림리 매산마을 일대는 고인돌의 밀집도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되고 있다.
[고대 시대]
초기 국가 시대 한반도 중 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성립되었으며, 고창은 마한의 영토로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했다.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모량부리현(牟良夫里縣)·송미지현(松彌知縣)·상로현(上老縣)·상칠현(上漆縣)에 속하였다. 그 뒤 757년(경덕왕 16) 모량부리현은 고창현으로, 송미지현은 무송현(茂松縣)으로, 상로현은 장사현(長沙縣)으로, 상칠현은 상질현(尙質縣)으로 개칭되었으며, 보리고을을 상징하는 모량부리의 속명인 모양(牟陽)이 이곳의 지명으로 함께 사용되어 왔다. 뒤에 고창·무송·장사 3현은 무령군(武靈郡)[영광]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상질현은 고부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
고창현은 통일 신라 시대에 무령군의 속현이었다가 고려 초기에 고부군에 속하더니 상질감무(尙質監務)가 겸했고, 장사현은 영광군에 속했으며, 무송현도 초기에는 영광군에 속했다가 장사감무가 겸임하였다. 또한 상질현은 고부군에 속했다가 장덕(章德)[창덕]으로 고쳐 감무를 두고, 고창을 겸무하게 되었다. 특히 고창 지방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전라남도 지방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는 당시의 장사현과 무송현이 나주목 영광군에 속해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피해 장덕을 흥덕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시대]
조선 초기인 1401년(태종 1) 고창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455년(세조 1) 지방 방위 조직의 개편에 따라 나주진관(羅州鎭管)의 속읍이 되면서 현감을 파견했고, 속오군(束伍軍)은 입암산성에 속하였다. 무송현과 장사현은 1417년(태종 17) 무장현(茂長縣)으로 통합되면서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겸무했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1482년(성종 13) 현감으로 고쳤고, 1836년(헌종 2) 무장군으로 승격되었다. 무장의 별호는 사도(沙島)였다. 흥덕현은 1401년(태종 1)에 고창현을 분리하고,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 겸 판현사를 두었다. 1417년에 진을 부안현으로 옮기고 현감을 두었다. 별호는 흥성(興城)이었다. 흥덕현은 1455년(세조 1) 전주진관의 속읍이 되었고,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난 고창현의 호수는 164호, 인구는 974인, 무장현은 호수 356호, 인구 2,033인, 흥덕현은 호수 216호, 인구 1,051인이었다. 흥덕현은 호수 216호, 인구 1,051인이었다. 무장현의 토지결수는 간전(墾田) 5,895결이고, 고창현은 간전 2,235결, 흥덕현은 간전 3,134결이었다. 무장현과 흥덕현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조기, 새우, 숭어, 오징어 등 수산물을 충분이 생산하였고, 고창현의 덕암리와 흥덕현의 갑향은 자기를 생산하는 소(所)였다.
조선 시대 전국의 교통 통신망을 연결하는 기구로 역(驛)과 원(院) 그리고 봉수(烽燧) 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먼저 교통 제도를 보면, 전라도에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역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고창 지역에는 전라좌도에 속한 청송역이 있었다.
원은 관리들이 지방 출장을 나갈 때 숙식을 하는 곳이다. 무장현 관내에는 사신원(四信院), 청계원(靑溪院), 요광원(要光院) 등이 있었고, 고창현 관내에는 반룡원(盤龍院), 인계원(仁戒院) 등이 있었으며, 흥덕현(興德縣) 관내에는 해천원(蟹川院), 구을원(仇乙院), 갑향원(甲鄕院) 등이 있었다.
봉수는 횃불 연기로써 중앙이나 변경에 긴급한 사항을 알리는 방법으로,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고창 지역에는 무장현에 고리포 봉수와 소응포 봉수가 있어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군사적인 소식을 중앙에 올려 보냈다.
조세로 징수한 미곡, 포백(布帛) 등을 해상으로 운송하여 중앙에 올려 보내는 것을 조운(漕運)이라 하고, 조세를 보관하는 곳을 조창(漕倉)이라 한다. 전라도의 조운과 조창은 덕성창과 법성포창이 중심지였는데 고창, 흥덕, 무장의 세곡은 법성포창으로 운반되었다. 1420년에는 무장향교가, 1512년(중종 7)에는 고창향교가, 1621년(광해군 13)에는 흥덕향교가 창건되어 이 지방의 유교 문화를 보급·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근대]
1894년 동학 농민군의 혁명이 일어나자 고창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무장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마을[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앞 강변에 4천여 명이 집결하였다. 3월 20일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과 함께 무장봉기의 대의를 밝히는 소위 무장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제1차 무장기포이다.
비록 동학 농민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민중의 의식은 점차 살아나고 있었다. 1898년(고종 35) 12월 27일 흥덕군수 임용현(任鏞炫)의 탐학에 저항하여 이화삼(李化三)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이화삼은 만민공동회의 회원으로 새로운 민중 운동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흥덕의 농민 소요가 끝난 몇 달 뒤에 정읍의 최익서(崔益瑞)가 농민들을 이끌고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고 보국안민한다는 기치 아래 고창으로 쳐들어 왔으나 패퇴하였다. 그들은 당초 고창과 광주를 점령한 뒤 전주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고창 싸움의 패배로 끝이 나고 말았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떨치고 일어나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다. 1906년 병오년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과 임병찬을 소개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한 사람이 고창 신림면 태생의 고석진(高石鎭)이다. 그는 최익현의 제자로서 스승을 따라 싸우다 대마도로 잡혀 갔다가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출신인 정시해(鄭時海)도 최익현의 제자로서 스승의 의진에 참가하여 중군장을 맡아 활약하던 중 순창에서 전사하였다.
1895년 지방 제도의 개편에 따라 고창현은 군으로 승격되어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무장군은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남도에 편입되었고, 1906년 다시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흥덕현은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06년 부외·부내 두 면을 병합하여 부안군(富安郡)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고창, 무장, 흥덕 3개의 군이 하나로 합쳐져 고창군이라 칭해졌으며, 1935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14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현대]
1955년 7월 1일 고창면이 고창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 신림면 제하리가 흥덕면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 2월 15일에 성송면 산수리 일부가 대산면에, 대산면 중산리 일부가 송산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7년 1월 1일에 성내면 조동리 일부가 정읍군 소성면에, 고수면 봉산리 일부가 고창읍에, 상하면 송곡리 일부가 해리면에, 성송면 상금리가 대산면에, 신림면 송암리가 흥덕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고창은 한국의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 태어난 곳이다. 3·1운동을 주도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민권 신장에 기여함은 물론이고 보성전문학교를 운영하여 이 땅의 미래를 책임지는 인재를 양성한 인촌 김성수가 고창의 부안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이 되어 국가 건국에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 출생인 근촌 백관수(白寬洙)는 동경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고, 정부 수립 후 한민당을 설립하여 민족 진영을 대표하였다. 그는 제헌국회의원이 되어 초대 법사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
고창고등보통학교[고창고보]는 일제 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창고등보통학교는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불어 넣는 교육을 시켜 일제에 저항하는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는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김개남 등이 무장에서 기포한 그 정신을 계승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이 고창군의 역사에 면면히 흘러 앞으로도 한국사에서 고창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