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94 |
---|---|
한자 | 高敞靑年會 |
영어음역 | Gochang Cheongnyeonhoe |
영어의미역 | Gochang Youth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기화 |
[정의]
1910년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애국 계몽 및 항일 단체.
[개설]
고창은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의 제1차 봉기 지역이자 그 지도자인 전봉준의 태생지이다. 당시 고창의 많은 청년들이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했으며 희생자는 1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여기에 그 연장선이었던 1906~1909년의 의병 항쟁 기간에도 많은 청년들이 희생되어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됨으로써 1914년 3월 1일 고창·흥덕·무장의 3개 군이 통합될 때까지 고창 지역에서는 청년 운동 조직이 결성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격동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성장기를 보낸 새로운 청년들이 의욕적으로 선배들의 우국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 투쟁 의식으로 재무장함으로써 고창 지역에서도 애국 계몽 및 항일 운동을 위한 청년 조직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계기를 만든 주역은 당시 고창의 혈맹 3인방이었던 은규선(殷圭宣)[1890~1942], 김승옥(金升玉)[1889~1962], 신기업(申基業)[1892~1975]이었다.
이중 은규선은 고창읍 읍내리 140번지에서 은익삼(殷益三)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문 사숙에서 수학한 후 고창 사립 양명학교에서 신학문 공부를 시작하여 1910년 3월 26일 3학년 전 과정을 이수하였다. 은규선은 고창의 한문 사숙과 양명학교 출신 중에서 항일 투쟁에 가담 할 수 있는 동지 규합의 핵심 인사로 고창 청년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승옥은 고창 3·1운동의 주동자[보훈 제656호‐건국훈장 애국상 수상]로서 1889년 고창읍 읍내리 481번지에서 호조참판 김준희(金俊禧)의 장손으로 출생하여 18세 때까지 한문 사숙에서 수학한 후 1916년 이후 고창 항일 민족 운동의 핵심적 인물로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기업은 판소리의 중흥조 신재효(申在孝)의 증손이자 구한 말 장릉(章陵) 참봉 신태환(申泰煥)의 장남으로 고창읍 읍내리 28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자산가로서 고창 항일 민족 운동의 재정적 후원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낸 숨은 공로자였다.
[변천]
1916년 1월 16일 밤 이들 3명은 신기업의 사랑채에 모여 평생 동지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혈서로 결의하면서 이후의 고창 지역 항일 민족 운동과 청년 운동 등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오진탁(吳璡鐸), 은성익(殷成益), 윤병묵(尹炳默) 등 30여 명의 우국 청년들을 규합하여 핵심 요원을 양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의 정신과 행동에 큰 영향을 준 지도자는 천도교 익산군 북일면 교구 지도자였던 이중열(李仲悅)이었다. 이중열은 고창 지역 청년 지도자들에게 "지기(至氣)가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원리를 발전시켜 나아갈 때 아무리 약소민족일지라도 민족론을 바탕으로 정진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항일 저항 의식을 일깨웠다.
은규선과 김승옥은 일찍이 이와 같은 자각지심으로 선각자들을 찾아다니고 동지들을 이끌어 내는 한편으로 향토 출신 해외 유학생 김성수(金性洙)[와세다대], 백관수(白寬洙)[명치대], 백남운(白南雲)[동경제대], 김수학(金秀學)[동경제대], 김연수(金年洙)[동경제대], 신사훈(申四勳)[프린스턴대] 등과 연락하면서 세계 정세를 살펴 나갔다.
그러던 중 은규선, 김승옥, 오진탁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 운동 조직과의 접선을 시도하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독립 운동 조직의 사전 연락을 받고 행상인으로 가장하여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리고 약 1년 후에는 계획을 바꾸어 국내에서 밀령을 받아 활동하기 위해 귀향하였다. 일본 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오진탁은 김제군 월촌면으로 이주하였고 김승옥은 고창면사무소 서기로 위장 취업했다. 은규선은 단독으로 청년 운동의 불씨를 지펴내기로 하는 등 외형상 완전 별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으로 약소민족의 해방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어 국내에서도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은규선과 김승옥이 그 준비 작업으로 신기업의 자금 지원과 함께 고창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청년 조직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또한 고창의 한문 사숙 출신자와 양명보통학교 출신자 중 사상이 확고한 청년들을 동지로 규합하면서 1918년 11월 초 마침내 고창청년회의 역사적인 창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활동사항]
고창청년회의 핵심 인물인 김승옥과 은규선을 중심으로 교육 이념이 투철한 성내면 칠성동의 이휴열(李休烈), 성송면 암치리의 강대식(姜大湜), 대산면의 정영식(丁永植), 아산면의 오자환(吳滋煥) 등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찬조금을 후원받았다. 또한 천장욱(千章郁) 군수의 특별 배려와 함께 고창읍 동부리 고창읍성의 북치(北雉) 아래에 있는 옛 고창관아 화포청(火砲廳)의 넓은 뒷마당에 터를 마련하여 청년회관을 건립하였다.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청년회관은 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해준 110여 원의 기금으로 조성하였다. 신식 공법인 합장식(合掌式)[갓쇼비끼 목재에 못을 쓰지 않고 합각으로 어긋 매김 하여 천정을 높이는 건축 양식]으로 만든 ‘ㄱ자’형의 높은 창고식 목조 건물로 높이 12자에 함석지붕을 얹은 6칸 집이었다.
또한 청년회관은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등학교 교실 세 칸 정도에 다목적 공회당 형식으로 야학 시설, 대회의실, 노동회관 등을 갖춘 회관이었으며 출입구 복도에는 각 일간 신문과 잡지류, 계몽 포스터까지 게재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청년회관은 매일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찾아와 신문화를 접하고 시국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정보 제공소의 역할을 수행하고 밤마다 야학 교육을 받는 학생들로 꽉 들어차는 등 고창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신지식의 제공과 계몽 활동의 중요한 장소였다.
한편 1919년 3·1운동의 기세가 전국 각지로 전파되면서 고창에서도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이 체포 될 것을 각오하고 모양성의 북치에서 청년회원들 및 고창보통학교 고학년들과 합세하여 시내를 향해 행진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자들 중 김승옥[31세]이 1년 6개월, 오동균[24세]이 10개월, 김창규[27세]가 6개월을 각각 언도받았으며 김명만(金明萬)[19세], 곽기선(郭琪宣)[17세], 김병일(金炳日)[23세], 김응권(金應權)[33세], 박철근(朴喆根)[28세], 박영근(朴永根)[25세], 홍종규(洪鐘奎)[18세], 신영택(申永澤)[17세], 이성협(李成浹)[26세], 김화종(金華鐘)[17세], 윤병훈(尹炳勳)[20세] 등 11명의 청년회원은 고창경찰서에서 태형(笞刑 10대를 받고 방면되었다.
[현황]
1918년 11월 창립 당시 주요 회원은 은규선, 김승옥, 은성익, 윤병묵, 강대직(姜大直), 강대식, 오의균(吳毅均), 오진탁, 오동균(吳東均), 김창규(金昌奎), 김응식(金應植), 윤병훈(尹炳勳), 신기초(申基礎), 신기준(申基準), 박용순(朴龍淳), 박영근(朴永根), 박철근(朴喆根), 이세봉(李世鳳), 이성협(李成浹), 강석영(康錫永), 이종택(李鐘澤), 신대길(申大吉), 김창한(金昌翰), 김병직(金炳直), 신송환(申松煥) 등이었으며, 회장으로는 최고 연장자인 은성무(殷成武)[1882년생]가 추대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창청년회는 호남 지역 중 군 단위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조직된 청년회였으며 단순한 청년 운동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통한 독립 운동까지 그 활동 영역을 확장한 청년 활동 단체로 민족 사학의 본산인 고창고등보통학교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