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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585
한자 永補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현대/현대
집필자 강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 - 영보재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3년 9월 - 영보재 광산군 수성마을 유림들에 의해 개축
현 소재지 영보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수성마을 지도보기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에 있는 문화류씨 류절이 강학하였던 장소.

[개설]

문화류씨(文化柳氏) 일당(逸堂) 류절(柳節)[1517~1580]은 경기도 양주에서 류순장의 아들로 태어나 1542년(중종 37) 삼사에 딸린 정4품의 벼슬인 자의(諮議)에 제수되었다. 그 후 지평(持平)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으나, 을사사화로 류임 등이 화를 입은 것을 보고 벼슬을 포기하고 양주로 내려와 모친과 함께 인천에서 해남으로 내려오는 도중 나주 구진포에서 은거하였다. 류절이 어떤 경위로 전라도 광주에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수성마을에 있다.

[변천]

지금의 건물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63년 9월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수성마을 유림들에 의해 재건립되었다.

[형태]

현재 남아 있는 형태는 1963년 9월 개축된 것으로 건물은 시멘트로 기단을 조성한 후 그 위에 정평(正平) 주초(柱礎)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식 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두(柱頭) 위에는 굴도리[둥글게 만든 도리]를 올린 3량집이다. 창호는 분합문으로 되어 있고 띠살창이며 청판을 대고 있다.

[현황]

류절과 둘째아들 농포(弄圃) 류희달(柳希達)[1571~1631],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류시필(柳時必)[1611~1643],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류인옥(柳寅玉)[1850~1919] 등이 16세기 말에 건립된 사우(祠宇) 덕림사(德林祠)에 배향되어 있어, 현재는 영보재덕림사의 재각(齋閣)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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