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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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慈仁縣 |
영어공식명칭 | JaIn-hyeon |
이칭/별칭 | 기화현,인산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757년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자인현(慈仁縣)은 757년(경덕왕 16) 노사화현(奴斯火縣)을 개칭하여 설치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남산면·용성면과 진량읍 남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별호는 ‘기화(基火)’ 또는 ‘인산(仁山)’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자인현은 757년 군현제(郡縣制)를 강화하고, 명칭을 한자식으로 아화(雅化)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노사화현을 ‘자인현’으로 개칭하였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설치 연혁 및 변화상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여러 읍지에는 1637년(인조 15) 복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자인군으로의 개칭은 1895년 5월 26일[음력]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의거한 것이다. 그 외에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 등에 자인현의 연혁과 현황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15세기 전반 자인현의 호구는 237호, 1,006명이었으나, 『여지도서』에 수록된 호구는 1759년(영조 35)에는 2,970호, 11,333명[남자 5,383명, 여자 5,950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나며, 같은 책에서 전결의 경우 한전(旱田)이 1,730결 8부 8속, 수전(水田)이 1,279결 12부 3속으로 확인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자인현의 토성은 박(朴)·한(韓)·정(鄭)·주(周)씨, 내성(來姓)은 임(任)·변(邊)씨이다. 이들 토성 세력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자인현 지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원무(女圓舞)의 주체인 한장군(韓將軍)을 고려 토성 세력으로 보기도 하나, 조선 시대 이후 이상의 토성 중 사족으로 성장한 세력은 없다. 대신 타읍에서 이주해 온 최(崔)·이(李)·박(朴)·김(金)·전(全)·안(安)·허(許)·류(柳)·배(裵)·백(白)·배(裵)씨가 조선 시대 이후 향권을 주도하였다.
[변천]
자인현은 고려 개창 후 새 왕조의 통치체제에 따라 지방제도가 개편되는 과정에서 1018년(현종 9)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도 자인현의 읍격은 속현이었지만, 내부적으로 재지 사족이 성장하는 가운데 1562년(명종 17) 향교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세 행정과 고을 운영을 둘러싸고 주읍(主邑)이었던 경주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16세기 후반부터 자인현 재지 사족들은 경주에서 독립은 추진하게 된다. 이에 1584년(선조 17) 경산과의 합속, 1599년에는 대구와의 합속이 각각 추진되었지만 경주부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630년대부터는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여, 여러 차례 상소문 끝에 1637년(인조 15) 복현이 이루어지게 되고, 초대 자인현감으로 임선백(任善伯)이 파견되었다. 이어 1653년(효종 4)에는 생활권이 같았던 구사부곡(仇史部曲)[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일대]을 합속시켜, 이른바 완읍(完邑)을 이루게 된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음력] 제2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따라, 1895년 윤5월 1일[양력 6월 23일]부로 기존 8도 체제를 23부 체제로 개편하고,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부와 군으로 이원화하면서 전국이 23부 337군 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자인현은 23부 가운데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자인군이 되었고, 군수(郡守)를 파견하였다.
[의의와 평가]
자인현의 존재는 우리나라 중세 왕조의 지방행정 운영에서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고려 초 구획된 행정구역의 읍격이 대부분 조선 초 통폐합을 통해 대대적 정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인현은 특이하기도 17세기 때 복현한 고을이다. 특히 복현 과정에서 부세 행정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둘러싸고 자인현과 주읍인 경주부 간의 치열한 여론전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지방 통치의 실제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