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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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應智 |
영어공식명칭 | Jung Eungji |
이칭/별칭 | 원도(源道),농수(農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68년 - 정응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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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정응지 하양현 이거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정응지 가선대부 승품 |
몰년 시기/일시 | 1643년 - 정응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10년 - 영모재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27년 - 애련정 중건 |
출생지 | 정응지 출생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
거주|이주지 | 정응지 이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환상리 |
묘소|단소 | 정응지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
사당|배향지 | 정응지 우모소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인안길20길 104-6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동래 |
대표 관직|경력 | 가선대부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 정착한 학자.
[개설]
정응지(鄭應智)[1568~1643]는 경산 지역에 정착해 건흥지(乾興池)와 만세보(萬世洑)를 축조하였다.
[가계]
정응지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도(源道), 호는 농수(農叟)이다. 아버지는 도사(都事)를 지낸 정상(鄭詳), 어머니는 김성탁(金聖鐸)의 딸 경주 김씨(慶州金氏), 할아버지는 진사 정구수(鄭龜壽),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정안충(鄭安忠)이다. 정응지의 부인은 박희영(朴禧永)의 딸 정부인(貞夫人) 순천 박씨(順天朴氏)와 신병원(申秉元)의 딸 정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정응지의 선대는 경주·영천 일대에 세거하다가, 정응지 대에 경산으로 이거하였다.
[활동 사항]
정응지는 1568년(명종 22) 경상도 경주부 교동(校洞)에서 출생하였다. 1590년(선조 23) 위독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손을 깨물어 피를 입속으로 흘려보내니, 사흘 동안 목숨이 연장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정응예(鄭應禮), 동생 정응삼(鄭應參)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형의 만류로 홀로 참여하지 않고 노모를 봉양하였다.
1604년(선조 37) 영천군(永川郡)에서 하양현(河陽縣) 건흥(乾興)[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환상리]으로 이거하였다. 어느 날 정응지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하늘에서 눈을 내렸으니 백성을 위해 그곳에다 못[지(池)]을 축조하라고 지시하였다. 꿈에서 깬 정응지는 과연 들판에 큰 눈이 내려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곳에 큰 못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607년(선조 40) 2월 못을 완공한 뒤 ‘건흥지(乾興池)’라 명명하였는데, 이후 건흥들의 중요한 농업용수로 활용되었다. 또한 정응지는 사재를 털어 금호강 상류에 만세보(萬世洑)를 축조하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5) 건흥지 위에다 애련정(愛蓮亭)을 짓고 소요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애련정을 방문한 정구(鄭逑)[1543~1620]는 정응지를 ‘은군자(隱君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때 정응지는 정구에게 문인이 되기를 청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연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41년(인조 19) 천거되어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묘소]
정응지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익곡산(益谷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10년 정응지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모재(永慕齋)[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가마실길 113-18]를 건립하였다. 1927년에는 허물어진 애련정[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인안길20길 104-6]을 중수한 뒤, 정응지의 우모소(寓慕所)로 삼았다. 1926~1927년 이 지역에 수리사업이 진행되면서 정응지의 공적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 무렵 애련정 뒤에 정응지를 기리는 농수정공포공비(農叟鄭公褒功碑)가 세워졌는데, 송준필(宋浚弼)[1869~1943]이 비문의 시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