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08 |
---|---|
한자 | 金庾信 |
영어공식명칭 | Kim Yusin |
이칭/별칭 | 흥무대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삼국 시대 경산 지역에 부임한 무신.
[개설]
김유신(金庾信)[595~673]은 금관가야(金官加耶) 왕실의 후손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642년 백제군이 지금의 합천군(陜川郡)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을 때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어 수도인 경주 방어의 주역이 되었다. 현재 경산 지역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명소가 산재해 있다.
[가계]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한 구해왕(仇亥王)이다.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신주도 행군 총관(新州道行軍摠管)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을 죽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으로 소판(蘇判)·대량주 도독(大梁州都督) 안무 대량주 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으로 신라 왕실의 주요 인물이었다.
[활동 사항]
김유신은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었다. 629년(진평왕 51)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처음으로 주목할 만한 전공을 세웠다.
김유신은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서 수도 경주를 방어하기 위해 압량주 군주에 임명되면서 군사적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주로 백제와의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660년(태종무열왕 7)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주역이 되었다. 647년(선덕여왕 16)에 비담(毘曇)의 난(亂)을 진압하여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지켰고, 무열왕(武烈王)의 즉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8년(문무왕 8) 10월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 혹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다.
[묘소]
김유신은 문무왕의 각별한 예우로 금산원(金山原)에 묻혔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송화산의 김유신묘(慶州 金庾信墓)[사적 제21호]를 묘소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하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1 김유신조에는 경명왕(景明王)[재위 917~924]이 추봉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561년(명종 16) 서악서원(西嶽書院)[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에 제향되었다.
한편, 경산 지역에는 압량군 군주를 지낸 인연으로 김유신과 관련된 명소가 산재해 있다. 홍주암(紅珠庵)[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산55-10]은 소년 시절 중악(中嶽)[팔공산]에서 수련하던 김유신이 삼국 통일의 염원을 기도했던 곳이라고 한다. 경산 병영유적(慶山 兵營遺蹟)[사적 제218호]은 압량군 군주로 있던 김유신이 병사들을 훈련시킨 유적이고, 경산시 압량읍에 위치한 마위지(馬爲池)는 김유신이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만든 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