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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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基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용엽 |
[정의]
개항기 진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돈암공 휘 기열 행록」에 의하면 정미년[1907]에 27지사와 더불어 구국의 기치를 들고 가재를 방매하여 병기를 모아 의병에 가담하였으며 기미년[1919] 3·1 운동 때 진안군의 주모자로서 태극기와 선언문을 양손에 들고 적병 속에 돌진하여 큰 소리로 꾸짖어 일제 만행을 꾸짖었다.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증조할아버지는 동몽교관을 지낸 오성복(成福)이고 할아버지는 오도한(吳道漢)이고 아버지는 선공감 감역을 지낸 오상길(吳相吉)이다.
[활동 사항]
오기열(吳基烈)[1889~?]은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한 달 후인 4월 6일 전영상 등과 함께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하고 다시 전영상과 격문을 붙이고 장날에 다시 시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8·15 해방 후 제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체포되어 전주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학문과 저술]
숙부 석남공의 문하에서 배웠다. 저술은 남기지 못하였다.
[묘소]
오기열은 1950년 음력 8월 16일 전주 형무소에서 총살당하여 진안군 백운면 선인봉 아래 장사하였으나 현재는 대전 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오기열의 항일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과 애국 애족 정신을 인정하고 1969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1977년 독립운동 유공 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