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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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春實 |
이칭/별칭 | 박동식(朴東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개항기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박춘실은 을사늑약 체결 후 진안 등지에 격문을 배부하여 의병을 모은 후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서 전과를 올렸으며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13도 연합 의병에도 참전하기도 하였다. 다시 본거지로 돌아온 후 덕유산 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활동 사항]
박춘실(朴春實)[1875~1914]은 박동식(朴東植)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무주·장수·진안·용담 등지에서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13도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이 있을 때에 호남 창의 대장으로 양주까지 진출하여 참전한 바 있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전라북도 무주군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군 천반산, 성수산, 장수군 덕유산, 무주군 적상산, 토옥동 문성어전, 농수리, 양악, 진도리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을 부장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수비대장 조사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는 문성동 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 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 순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